OWN 뉴스 · 2026.11.01 14:55

“아들 공방에 4000만원 보태줬는데..” 6년 뒤 아들이 내건 현수막에 울었다

평생 한 가지 일을 해 온 부모는 자식이 그 일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와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하고, 부모는 말없이 등을 밀어 주면서도 마음 한쪽이 쓸쓸해집니다. 돈은 보태 줄 수 있어도 그 쓸쓸함까지 덜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북 안동시에 사는 배영길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스무 살 무렵 남의 목공소에 견습으로 들어갔고, 스물아홉에 시장 뒷골목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습니다. 그 뒤로 40년 동안 장롱과 밥상,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내 박정순 씨와 단둘이 살고, 큰아들 현우는 대구에서 지내며 딸은 결혼해 포항에 삽니다.

영길 씨의 의자에는 못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홈을 파고 촉을 깎아 끼워 맞추는 짜맞춤 방식이었습니다. 의자 하나에 열흘이 걸렸지만, 동네 사람들은 혼수 의자를 맞출 때면 꼭 영길 씨를 찾았습니다. 정순 씨는 남편이 받은 주문을 낡은 장부에 날짜와 집 이름까지 꼼꼼히 적어 두었습니다.

현우는 어릴 적 목공소 톱밥 더미 위에서 놀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깎아 준 작은 의자에 앉아 숙제를 했고, 대패질하는 아버지 옆에서 나뭇결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 아들이 대학에서 가구 디자인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영길 씨는 속으로 무척 기뻤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현우는 명절에 내려와 목공소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방식은 너무 촌스러워요. 요즘 누가 의자 하나에 열흘을 써요. 기계로 깎고 디자인으로 승부해야죠.” 영길 씨는 대꾸하지 않고 대패만 밀었습니다. 그날 밤 정순 씨는 남편이 마당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6년 전 봄, 현우가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아버지, 대구에 제 공방을 내고 싶어요. 4000만 원만 빌려주세요. 3년 안에 꼭 갚을게요.” 영길 씨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갚을 생각은 말고, 망하지만 마라.”

그 돈은 영길 씨 부부가 20년 동안 부은 적금 2800만 원에, 목공소의 띠톱과 대패 기계를 정리한 1200만 원을 보탠 것이었습니다. 정순 씨가 “당신 기계까지 팔면 일은 어떻게 하려고요” 하고 말리자 영길 씨는 웃었습니다. “이제 큰일은 못 해. 손으로 하는 건 손으로 하면 되지.”

그 뒤로 현우는 늘 바빴습니다. 전화를 해도 “잘하고 있어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딸이 휴대전화로 보여 준 아들 공방의 가구는 매끈하고 세련되었지만, 영길 씨 눈에는 어딘가 낯설었습니다. 아들이 끝내 아버지의 방식을 버렸구나 싶어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시장 떡집 할머니가 “현우가 우리 집에 와서 의자를 한참 보고 갔다” 하고 말했고, 몇 해 뒤에는 이발소 주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길 씨가 물으니 현우는 “지나가는 길에 인사드린 거예요” 하고 말을 돌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순 씨는 괜히 부엌으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올 시월, 현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방 첫 전시회를 연다며 꼭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길 씨는 가장 아끼는 회색 점퍼를 꺼내 입고 아내와 함께 대구로 향했습니다.

전시회 날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골목 안쪽 2층 건물 앞에 다다른 순간, 영길 씨는 우산을 쥔 채 걸음을 멈췄습니다. 입구에 하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개의 의자 – 목수 배영길, 1985~2010’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냄새가 훅 끼쳐 왔습니다. 낯익은 의자들이 한 줄로 놓여 있었습니다. 의자마다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1987년, 시장 떡집 맏딸 혼수 의자’, ‘1992년, 동네 이발소 손님 의자’, ‘1998년, 쌍둥이네 공부 의자’.

영길 씨는 의자 하나하나를 손으로 쓸어 보았습니다. 다리 하나를 다시 깎느라 밤을 새웠던 의자, 갓 시집온 새댁이 고맙다며 떡을 싸 왔던 의자가 거기 있었습니다. 칠이 벗겨졌던 자리는 곱게 다듬어져 있었고, 헐거워졌던 이음매는 단단히 다시 맞춰져 있었습니다.

현우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처음 2년 동안 제가 만든 의자는 반품이 계속 들어왔어요. 기계로 빨리 만들었더니 1년도 안 돼 흔들리더라고요. 그때 떡집 할머니 댁에서 아버지 의자를 봤어요. 30년이 넘었는데 하나도 안 흔들렸어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옛날 주문 장부를 빌렸어요. 6년 동안 그 집들을 한 집씩 찾아다녔어요. 열여덟 개는 되사고, 일곱 개는 전시 끝나면 돌려드리기로 하고 빌려 왔어요. 이음매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깎았는지 배웠어요.”

현우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촌스럽다고 했던 거,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의자가 제 선생님이었어요. 첫 전시는 꼭 아버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정순 씨가 남편의 팔을 잡았습니다. “장부 달라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당신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영길 씨는 이발소 의자에 천천히 앉았습니다. 어린 현우가 머리를 깎으며 울던 바로 그 의자였습니다. 영길 씨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전시장 안쪽에는 현우가 새로 만든 의자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양은 세련되었지만 다리와 등받이는 모두 짜맞춤이었습니다. 영길 씨는 그중 하나를 흔들어 보고 말했습니다. “잘 맞췄다. 이건 30년 간다.” 현우는 그 말에 아이처럼 웃었습니다. 4000만 원 이야기는 그날 누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일을 낮춰 보는 듯한 말을 하면 서운한 마음이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식은 자기 길을 한참 돌아간 뒤에야 부모가 걸어온 길의 무게를 알아보곤 합니다.

그러니 서운함이 들 때 너무 서둘러 마음의 문을 닫지 마세요. 묵묵히 해 온 일은 언젠가 누군가 알아보기 마련이고, 그 누군가가 내 자식일 때 기쁨은 더욱 큽니다.

늦가을, 영길 씨의 목공소 마당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현우는 아버지 옆에 앉아 끌로 촉을 깎습니다. 짧은 해가 기울 무렵이면 부자의 대패질 소리가 골목 끝까지 나란히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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