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친구 사이에 오가는 부조금은 셈이 아니라 마음이라고들 합니다. 기쁜 날 함께 웃고 슬픈 날 곁을 지켜 준 세월이 쌓여 의리가 됩니다. 그러나 한쪽만 마음을 다해 온 관계라면, 그 바닥은 내가 무너진 날에야 드러나기도 합니다.
장 씨는 올해 쉰아홉입니다. 수도권의 작은 도시에서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서른 살에 보험 설계사로 일을 시작해 마흔여덟에 지점장이 되었고, 2년 전 정년을 채우고 물러났습니다. 공기업에서 퇴직한 남편과의 사이에 출가한 딸 하나와 직장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보험 일은 결국 사람을 챙기는 일이었습니다. 장 씨는 고객의 생일과 기일을 수첩에 적어 두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습관은 집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장 씨에게는 30년 동안 써 온 낡은 경조사 수첩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수첩에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이 대학 동기 윤 씨였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과에서 만나 학교 앞 하숙집 방 한 칸을 함께 썼습니다. 겨울에 연탄이 떨어지면 이불 하나를 같이 덮고 잤습니다. 윤 씨 집안 형편이 기울었을 때는 장 씨가 과외비를 털어 윤 씨의 하숙비 석 달 치를 대신 냈습니다. 졸업식 날 윤 씨는 장 씨의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너 아니었으면 나 졸업 못 했다.”
수첩을 처음 쓰기 시작한 30년 전부터 윤 씨 이름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15년 전 윤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 씨는 100만 원을 들고 가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켰습니다. 6년 전 윤 씨 어머니 상에도 100만 원을 보냈습니다. 윤 씨 아들과 딸의 결혼식에는 150만 원씩 냈습니다. 윤 씨 남편이 수술했을 때 건넨 병문안 봉투와 손주 돌 반지까지 더하니 모두 600만 원이었습니다.
넉넉해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장 씨는 지점장 시절에도 월급날마다 경조사 통장에 10만 원씩 따로 넣었습니다. 남편이 “윤 씨네는 좀 과하지 않소” 하고 물으면 장 씨는 웃었습니다. “여보, 걔는 나한테 가족이에요. 하숙방에서 이불 같이 덮던 사이라니까.”
서운한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몇 해 전 동창회에서 윤 씨는 다른 동기들에게 장 씨를 “우리 보험 아줌마”라고 소개하며 웃었습니다. 장 씨 아들 결혼식에는 축의금만 보내고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장 씨는 바빴겠거니 하고 넘겼습니다.
수첩을 쓴 지 30년째 되던 올가을, 장 씨의 친정어머니가 여든여덟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 씨는 빈소에서 사흘 동안 몇 번이고 문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윤 씨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밤에 문자 한 통이 왔을 뿐이었습니다. [미안해, 일이 겹쳐서. 계좌로 보냈어.]
삼우제를 지낸 날 저녁에는 비가 창을 두드렸습니다. 장 씨는 아들과 함께 식탁에 방명록과 조의금 봉투를 펼쳐 놓고 장부를 정리했습니다. 계좌 입금 내역을 읽어 내려가던 아들이 잠시 멈췄습니다.
“엄마, 윤 이모님은 5만 원이네요.”
장 씨는 대답 대신 서랍에서 경조사 수첩을 꺼냈습니다. 누렇게 바랜 쪽마다 윤 씨 이름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장 씨는 그 숫자들을 한참 동안 손끝으로 쓸었습니다. 돈이 적어서 서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윤 씨 부모님 두 분의 빈소에 모두 장 씨와 함께 가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사흘 내내 장례식장에 와서 신발 정리까지 도와준 동기 한 씨였습니다.
“장 지점장, 이거 말할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어. 그런데 네가 모르고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잠시 뒤 사진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장 씨가 들어가 있지 않은 동기들 단체 대화방 화면이었습니다. 한 동기가 “장 지점장 어머님 상이래, 다들 가지?” 하고 올린 글 아래에 윤 씨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받을 만큼 받아 놓고 뭘 또 바라냐. 보험 들어 달라고 우리한테 얼마나 들이밀었는데. 난 계좌로만 보낼래.]
장 씨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30년 동안 장 씨가 윤 씨에게 먼저 보험 이야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윤 씨 남편의 수술을 앞두고 윤 씨가 먼저 물어 와서 들어 준 보험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아들이 달려와 어깨를 붙들었습니다. “엄마, 괜찮아요?” 한동안 말이 없던 장 씨가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괜찮다. 이제야 장부가 맞는구나.”
그날 밤 장 씨는 남편과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편은 “따지러 가지는 마오. 당신만 더 아프오” 하고 말렸습니다. 장 씨도 따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정리할 것은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장 씨는 윤 씨 계좌로 5만 원을 돌려보내고 짧은 문자를 남겼습니다. [어머니 가시는 길에 마음 없는 돈은 올리고 싶지 않아 돌려보낸다. 네 말대로 우리 집이 받을 만큼 받았다면 나도 줄 만큼 줬다. 30년 셈은 여기서 끝내자. 그동안 고마웠다.]
곧바로 윤 씨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얘, 그거 농담이었어. 단톡방에서 한 말을 뭘 그렇게…” 장 씨는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농담이면 더 서운하다. 나는 네 아버님 빈소에서 사흘을 잤어. 그건 농담이 아니었거든.” 장 씨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장 씨는 경조사 수첩에서 윤 씨 이름이 적힌 쪽마다 연필로 줄을 그었습니다.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30년 동안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수첩 맨 뒷장에 새 이름들을 적었습니다. 빗속에 빈소를 지켜 준 한 씨, 휴가를 내고 달려온 옛 지점 후배들, 국을 끓여 온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달 장 씨는 경조사 통장을 헐어 그들에게 일일이 밥을 샀습니다.
부조금은 갚아야 할 빚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받아도 되는 돈도 아닙니다. 그 안에는 서로의 기쁜 날과 슬픈 날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약속을 한쪽만 지키고 있다면, 오래된 의리라는 이름으로 그 관계를 붙들고 있을 까닭은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넓게 두기보다 깊게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는 조용히 물러나십시오. 그리고 내가 무너진 날 곁에 서 준 사람에게 남은 정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남은 세월을 덜 외롭게 사는 길입니다.
11월 첫 주, 장 씨는 남편과 함께 어머니가 잠든 산자락 공원묘지를 찾았습니다. 은행잎이 노랗게 깔린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 국화 한 다발을 내려놓았습니다. 장 씨는 봉분 앞에 오래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바라보다가, 남편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