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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건네는 돈에는 영수증이 없습니다. 부모는 얼마를 보냈는지 세지 않고, 그 돈이 손주 학원비가 되고 반찬값이 되었으리라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어긋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돈을 잃었을 때보다 마음이 더 크게 무너집니다.
경상도 바닷가 마을에 사는 장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서른 살에 회사 택시 운전대를 처음 잡았고, 마흔 살에 개인택시 면허를 받아 26년째 같은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아내는 7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아들은 가까운 도시에서 며느리와 함께 초등학생 손녀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며느리는 결혼 전 작은 무역회사에서 경리 일을 했습니다. 숫자에 밝고 서류 정리가 꼼꼼했습니다. 장 씨가 운행 장부를 붙들고 쩔쩔맬 때면 며느리가 옆에 앉아 칸을 맞춰 주었습니다. 아내를 보내고 사망 신고와 상속 서류를 챙긴 것도 며느리였습니다. 장 씨는 동료 기사들에게 “우리 며느리는 세무서 직원 저리 가라”며 자랑하곤 했습니다.
장 씨 환갑 때는 며느리가 직접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무쳐 상을 차렸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안 계셔도 저희가 있잖아요.” 장 씨는 그 말에 돌아서서 눈가를 훔쳤습니다. 그날부터 며느리는 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5년 전 봄, 아들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아들은 작은 업체로 옮겼지만 월급이 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명절에 내려온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애 학원을 하나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장 씨는 그날 밤 적금 통장을 꺼내 보았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나가 밤 열 시에 들어오며 모은 돈, 아내와 늘그막에 여행이나 다니자며 부어 온 돈이었습니다. 이튿날 장 씨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음 달부터 내가 매달 100만 원씩 보내마. 손녀 공부는 끊지 마라.” 그날로 은행에 가서 자동이체를 걸었고, 그때부터 하루 두 시간씩 더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3년 전에는 오래 참아 온 오른쪽 무릎이 탈이 났습니다. 하루 열몇 시간씩 브레이크를 밟아 온 무릎이었습니다. 인공관절 수술비 600만 원은 남은 적금을 깨서 냈습니다. 퇴원하던 날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아버님, 병원 영수증도 주시면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나중에 필요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장 씨는 고마운 마음으로 영수증 뭉치를 통째로 건넸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고, 자동이체로 나간 돈은 6000만 원이 되었습니다. 그사이 아들 집에는 새 소파가 들어왔고, 며느리는 친정어머니와 바닷가 리조트에 다녀온 사진을 가족 단체방에 올렸습니다. 장 씨는 잠깐 서운했지만, 형편이 조금 나아졌나 보다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올해 5월, 장 씨는 동료 기사 오 씨와 함께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러 세무서 상담 창구를 찾았습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선생님 앞으로 부양가족 공제랑 의료비 공제가 이미 다른 분 연말정산에 들어가 있네요. 몇 해째 그렇습니다.”
직원은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택시 영업으로 일정 금액 넘게 소득이 있는 사람은 자녀 쪽 부양가족으로 올라갈 수 없고, 본인이 내지 않은 병원비도 공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잘못 받은 공제는 나중에 가산세까지 붙어서 돌려내야 할 수 있어요.” 장 씨는 그 ‘다른 분’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영수증을 건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주 토요일, 장 씨는 참외 한 상자를 사 들고 아들 집에 갔습니다. 늦봄 햇살이 베란다 유리창에 뜨겁게 내려앉은 오후였습니다. 아들은 손녀를 데리고 학원에 갔고, 현관문을 열어 준 며느리는 통화 중이라며 손짓으로 인사하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장 씨는 식탁에 참외 상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식탁 위에는 며느리가 쓰는 파란 서류철이 펼쳐져 있었고, 맨 위에 장 씨의 이름이 적힌 병원 영수증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반쯤 열린 안방 문틈으로 며느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엄마, 시아버지 덕에 올해도 환급 200만 원 나왔어. 아버님은 이런 거 모르셔. 이번 가을에 엄마 해외여행 보내 줄게. 어디 가고 싶은지 생각해 놔.”
장 씨는 식탁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습니다. 귀를 의심했지만, 웃음 섞인 그 목소리는 분명 며느리의 것이었습니다. 매달 생활비를 받으면서 시아버지를 자기가 ‘모시는 부양가족’으로 올리고, 시아버지가 적금을 깨서 낸 수술비까지 제 공제로 넣어 해마다 환급을 챙겨 온 것이었습니다.
방에서 나온 며느리는 식탁 앞에 선 시아버지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장 씨는 영수증 한 장을 들어 보였습니다. “세무서에서 다 들었다. 나는 소득이 있어서 너희 부양가족이 될 수 없다더라.”
며느리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버님은 어차피 공제 못 받으시니까, 버리는 게 아까워서 그랬어요.” 장 씨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아까웠으면 나한테 한 번만 물어보지 그랬냐. 내 이름을 쓰면서 나만 몰랐다는 게 서운한 거다.”
장 씨는 참외 상자를 그대로 둔 채 영수증 뭉치만 챙겨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 5년 동안 이어 온 자동이체를 해지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오 씨의 도움을 받아 자기 신고를 사실대로 바로잡는 수정신고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 처가 잘못 받은 공제는 너희가 바로잡아 돌려놓아라. 생활비는 이번 달로 끝이다. 손녀 학원비가 모자라면 그때는 네가 직접 와서 말해라.” 수화기 너머 아들은 한참 말이 없다가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고 울먹였습니다.
가족이 서류를 대신 챙겨 주는 일은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 이름이 적힌 서류라면,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 한 번은 확인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과 맡겨 두고 모른 척한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자식을 돕는 마음은 부모의 몫이지만, 그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은 자식의 몫입니다. 도움을 거두는 것이 정을 끊는 일은 아닙니다. 어긋난 셈을 바로잡아야 정도 다시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해 가을, 장 씨는 새로 든 적금 통장을 조수석 서랍에 넣어 두고 해안 도로 끝 방파제에 택시를 세웠습니다. 수평선 위로 노을이 번지고, 고깃배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포구로 들어왔습니다. 장 씨는 아내가 좋아하던 그 바다를 향해 창문을 내리고, 찬 바닷바람을 한참 동안 맞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