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3 09:01

“사남매에게 명절 반찬 싸 보냈는데..” 추석 아침 막내딸이 건넨 책 한 권에 울었다

자식이 집을 떠나면 어머니의 부엌은 더 바빠집니다. 같은 밥상에 앉지 못하니 반찬이라도 대신 보내는 것입니다. 받는 쪽은 반찬 한 통이라 여겨도, 보내는 쪽에게는 그 한 통이 안부이고 기도입니다.

신 씨는 올해 일흔둘입니다.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고추와 콩, 배추를 기르며 혼자 살고 있습니다. 스물셋에 이 마을로 시집와 밭을 일군 지 쉰 해 가까이 되었고, 남편을 먼저 보낸 뒤로도 열두 해째 혼자 밭을 지키고 있습니다. 슬하에는 두 아들과 두 딸, 사남매를 두었습니다.

사남매는 고등학교를 마치는 대로 하나둘 도시로 나갔습니다. 큰아들이 서울에서 처음 취직하던 해, 신 씨는 읍내 장에서 플라스틱 반찬통 열 개를 샀습니다. 멸치볶음과 깻잎장아찌, 무말랭이를 꼭꼭 눌러 담고 뚜껑마다 종이쪽지를 붙였습니다. “밥 거르지 마라.”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뒤로 명절마다 반찬 상자 네 개가 마을을 떠났습니다. 작은아들이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 일자리를 잃었을 때는 장아찌를 평소의 두 배로 담고 “굶지는 마라, 엄마 밭에 콩 많다”라고 적었습니다. 막내딸이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미역과 함께 “몸 찬 데 두지 마라”라는 쪽지를 넣었습니다.

준비는 늘 한 달 전부터였습니다. 고추를 따서 마당에 널어 말리고, 깻잎을 한 장씩 포개 양념을 바르고, 고들빼기는 쓴맛이 빠지도록 며칠을 물에 우렸습니다. 새벽에 반찬을 다 담고 나면 무릎이 저려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택배 트럭이 올 시간이면 상자를 안고 마을 어귀에 나가 서 있었습니다.

이웃 최 씨가 혀를 찼습니다. “형님, 요새 도시에 반찬 가게가 천지라던데 뭘 그리 싸 보내요.” 신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사 먹는 반찬에는 쪽지가 안 붙어 있잖은가.”

자식들은 고맙다는 전화는 해도 반찬통을 돌려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통이 아까워 서운하기도 했지만 신 씨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거기서 써라. 엄마는 또 사면 된다.” 그렇게 30년 동안 사남매에게 건너간 반찬통은 수백 개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사남매에게도 흘렀습니다. 큰아들은 쉰을 넘겼고 막내딸도 마흔 중반이 되었습니다. 손주들이 자라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면서 명절에 다 모이는 일은 해마다 드물어졌습니다. 전화도 점점 짧아졌습니다. 신 씨는 서운할 때마다 반찬을 한 가지 더 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이상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들은 “엄마, 고들빼기는 며칠이나 우려요?” 하고 물었고, 큰딸은 무말랭이 양념에 물엿을 넣는지 조청을 넣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신 씨는 별일이다 싶으면서도 신이 나서 한참씩 일러 주었습니다.

올해 추석을 열흘 앞두고 사남매에게서 차례로 전화가 왔습니다. 큰아들은 회사 일이 밀렸다고 했고, 큰딸은 시댁 어른이 편찮으시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출장이 잡혔다고 했고, 막내딸은 아이 시험이 코앞이라고 했습니다. “엄마, 미안해요. 이번엔 못 가요.” 네 번째 전화를 끊고 신 씨는 한참 동안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추석 전날, 신 씨는 습관처럼 쌀가루를 익반죽했습니다. 솔잎을 깔고 송편을 빚다가 열 개쯤에서 손을 멈추었습니다. 먹을 사람이 없는 송편이었습니다. 신 씨는 반죽을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두고, 남편 사진만 놓인 빈 차례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마당에서는 귀뚜라미 소리만 들렸습니다.

추석 아침,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습니다. 차례상에 술이라도 한 잔 올리려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최 씨였습니다. “형님, 얼른 마을회관에 좀 와 보소. 큰일 났어요.” 신 씨는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젖은 고샅길을 서둘러 걸었습니다.

마을회관 문을 연 신 씨는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길게 붙인 상 앞에 동네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그 뒤로 사남매와 며느리, 사위, 손주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먼저 소리쳤습니다. “엄마, 추석 잘 쇠세요!”

상 위를 본 신 씨는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멸치볶음, 깻잎장아찌, 고들빼기김치, 무말랭이가 담긴 그릇은 하나같이 낯익은 반찬통이었습니다. 뚜껑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은 통도 있었고, 신 씨가 매직으로 ‘큰애 것’, ‘막내 것’이라 적어 둔 글씨가 희미하게 남은 통도 있었습니다. 30년 전 읍내 장에서 처음 산 바로 그 통들이었습니다.

“엄마가 보낸 통, 하나도 안 버렸어요.” 큰딸이 말했습니다. “넷이 모아 보니 이백 개가 넘더라고요. 엄마 반찬은 엄마 통에 담아야 맛이 날 것 같아서요.”

그제야 사남매가 털어놓았습니다. 못 온다던 말은 모두 어머니를 놀라게 하려던 거짓말이었습니다. 1년 전 막내딸이 처음 말을 꺼냈고, 넷이서 날짜를 맞췄습니다. 지난 한 해 걸려 온 이상한 전화들도 쪽지에 적힌 반찬을 하나씩 나눠 맡아 어머니 손맛대로 배우려던 것이었습니다. 회관을 빌리고 어르신들을 모시는 일은 이장 윤 씨와 최 씨가 몰래 도왔습니다.

막내딸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두 손으로 내밀었습니다. 표지에는 ‘엄마의 쪽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책장마다 누렇게 바랜 쪽지가 한 장씩 붙어 있었습니다. “밥 거르지 마라.” “굶지는 마라, 엄마 밭에 콩 많다.” “몸 찬 데 두지 마라.” 쪽지 옆에는 날짜와 그 쪽지가 붙어 있던 반찬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 쪽지만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힘들 때마다 꺼내 봤어요. 이걸로 버텼어요.” 막내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사남매가 함께 쓴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엄마, 이제는 엄마가 밥 거르지 마세요.”

신 씨는 책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상 앞의 어르신들도 눈가를 훔쳤습니다. 큰아들이 고들빼기 한 젓가락을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렸습니다. 쌉싸름한 맛 끝에 단맛이 돌았습니다. 영락없는 신 씨의 손맛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사남매는 어머니 집으로 몰려가 덮어 두었던 반죽으로 송편을 마저 빚었습니다. 손주들이 빚은 송편은 모양이 제각각이었지만, 신 씨는 그중 가장 못생긴 것부터 집어 들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것은 반찬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대답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자식들의 냉장고 한구석과 서랍 속에 조용히 쌓여 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을 배운 손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식에게 반찬을 싸 보내는 분이라면 오늘은 쪽지 한 장을 함께 넣어 보세요. 부모님 반찬을 받는 분이라면 올해는 빈 통에 내 손으로 만든 반찬 한 가지를 담아 돌려보내 보세요.

지난주 신 씨는 마을 뒤 배추밭에서 김장 배추를 묶었습니다. 산자락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고, 밭고랑마다 늦가을 햇살이 고루 내려앉았습니다. 마루에는 사남매가 두고 간 반찬통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뚜껑마다 자식들의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신 씨는 그 통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올해 김장은 조금 더 넉넉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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