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를 모시는 자식과 돈을 보내는 자식 사이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이 쌓입니다. 보내는 쪽은 그 돈이 부모에게 잘 쓰이는지 궁금하고, 받는 쪽은 고맙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합니다. 그 침묵이 길어지면 어느새 서운함이 되기도 합니다.
경북 구미시에 사는 한영숙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12년째 구미 시내 보습학원의 노란 승합차를 몰며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남편은 공단에서 경비 일을 하고, 두 아들은 결혼해 대구와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영숙 씨는 삼 남매의 맏이로, 아래로 여동생 하나와 여덟 살 터울의 막내 남동생 정수 씨가 있습니다.
정수 씨는 어려서부터 말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영숙 씨가 열여섯에 구미 공장에 들어가 첫 월급을 받던 날, 장날에 하얀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동생에게 건넸습니다. 정수 씨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신발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영숙 씨가 들여다보니 동생은 새 운동화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정수 씨는 그대로였습니다. 상주시에서 20년 넘게 농기계 수리점을 하면서도 누나에게 먼저 전화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영숙 씨의 승합차가 고속도로에서 퍼졌을 때 정수 씨가 한밤중에 트럭을 몰고 달려와 고쳐 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동생은 “조심해서 다녀라” 한마디만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10년 전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혼자 남은 어머니가 가벼운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퇴원하던 날, 정수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모실게. 누나는 일 다니잖아.” 영숙 씨는 미안한 마음에 동생 손을 붙잡았습니다. “내가 못 모시니까 돈이라도 보탤게. 매달 50만 원씩 보내마.” 정수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누나도 빠듯하잖아. 됐어.” 그래도 영숙 씨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학원 기사 월급만으로는 매달 50만 원이 쉽지 않았습니다. 영숙 씨는 주말마다 결혼식 하객을 실어 나르는 차량 운행을 따로 맡았습니다. 남편도 군말 없이 자기 용돈을 줄였습니다. 그렇게 영숙 씨는 월급날인 매달 25일, 은행 앱을 열어 동생 통장으로 50만 원을 보냈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동생의 답장은 늘 같았습니다. “들어왔다.” 고맙다는 말도, 어머니가 어떻게 지내신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영숙 씨는 문자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했습니다. 몇 해 전 사촌에게서 정수가 트럭을 새로 바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혹시 엄마 돈을 다른 데 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전화할 때마다 “니 덕에 잘 산다” 하고 웃었습니다. 영숙 씨는 그 말이 딸 마음 편하라고 하시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렇게 10년, 120번의 송금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올여름, 어머니는 여든여덟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늦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날, 상주 외곽의 작은 절에서 어머니의 49재가 열렸습니다. 법당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마당의 배롱나무 꽃이 젖은 채 붉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재를 마치고 신발을 신던 영숙 씨 앞에 정수 씨가 다가와 손바닥만 한 USB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테이프 위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누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뭐니?” 정수 씨는 대답 대신 짧게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봐라.”
그날 밤 구미 집 식탁에서 영숙 씨는 남편과 함께 노트북에 USB를 꽂았습니다. 화면 가득 영상 파일이 떴습니다. 2016년 7월 25일, 8월 25일, 9월 25일…. 날짜는 모두 25일이었고, 세어 보니 꼭 120개였습니다.
첫 영상을 눌렀습니다. 상주 시내 작은 미용실에서 어머니가 파마 보자기를 두르고 앉아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를 든 정수 씨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오늘 누가 해 주는 거라고?” 어머니가 거울 속에서 활짝 웃었습니다. “큰딸이 해 주는 거지. 영숙이가.”
다음 영상에서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고등어 두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국숫집에서 잔치국수를 드셨고, 겨울에는 두꺼운 내복을 가슴에 대 보며 웃었습니다. 어느 영상이든 어머니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거 큰딸이 사 주는 거야.”
영숙 씨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화면 속 어머니의 걸음은 느려졌습니다. 몇 해 전부터는 정수 씨가 트럭 조수석에서 어머니를 안아 내리는 장면이 자주 나왔습니다. 새로 바꿨다던 그 트럭은 발판이 낮은 차였습니다. 그제야 영숙 씨는 동생이 왜 차를 바꿨는지 알았습니다.
마지막 파일은 올해 6월 25일이었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가 숟가락으로 팥죽을 겨우 떠 드시고 있었습니다. 정수 씨가 물었습니다. “엄마, 누나한테 할 말 없어?” 어머니는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영숙아, 고맙다. 니 덕에 맛있는 거 많이 묵었다.”
영숙 씨는 노트북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남편이 말없이 등을 쓸어 주었습니다.
그 밤 영숙 씨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정수 씨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누나, 나는 말을 잘 못 하잖아. 고맙다고 하면 그 돈 받는 게 더 미안해질 것 같았어. 그래서 누나 돈 들어오는 날마다 엄마 모시고 나갔다. 엄마가 누나 덕에 웃는 거, 누나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
영숙 씨는 목이 메어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10년 동안 “들어왔다” 한 줄을 서운하게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정수야,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겠다. 엄마 끝까지 모셔 줘서 고맙다.” 수화기 너머에서 동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응.”
말이 적은 사람이라고 마음까지 적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맙다는 말 대신 밥을 사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차를 고쳐 주고, 어떤 사람은 그날의 웃음을 기록해 둡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같습니다.
부모 부양비를 보내고 있다면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의심하기보다 한 번쯤 부모님의 하루를 직접 물어보세요. 모시는 형제의 수고도 함께 헤아려 주세요. 돈과 수고가 서로를 알아볼 때 형제는 부모가 떠난 뒤에도 남이 되지 않습니다.
올가을 영숙 씨는 25일에 맞춰 상주에 내려갔습니다. 정수 씨의 트럭을 타고 어머니가 다니던 국숫집에서 잔치국수 두 그릇을 시켰습니다. 돌아오는 길, 집집마다 처마 밑에 깎은 감이 주황빛 발처럼 늘어져 있었고, 늦은 오후 햇살이 그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았습니다. 남매는 트럭 창문을 내린 채 오래도록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