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08:22

“시어머니 병수발 다 들었는데..” 첫 기일 앞두고 남편이 숨긴 영수증에 눈을 의심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도 크지 않습니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내 편이 되어 주는 남편의 눈빛 하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것마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수십 년을 버텨 온 마음도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조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충청도 작은 읍내 장터 골목에서 30년째 국밥집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사골을 고고 머릿고기를 삶습니다. 손님상에 국밥 열 그릇을 내고 나서야 자기 밥을 겨우 한술 뜨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남편은 작년 가을 폐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닙니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은 조 씨가 마흔아홉 되던 해였습니다. 남편은 막내아들이고 위로 누나만 셋이었습니다. 시누이들은 모두 도시에 살았고, 어머니를 누가 모실지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고개를 숙였습니다. 결국 조 씨가 시어머니를 국밥집 뒤 살림방으로 모셨습니다.

그 뒤로 12년이 흘렀습니다. 장사하는 틈틈이 방으로 뛰어가 기저귀를 갈았고, 점심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도 시어머니 죽부터 먼저 떠 넣어 드렸습니다. 한겨울에 시어머니가 열이 올라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는 가게 문에 ‘사정상 쉽니다’ 쪽지를 붙여 놓고 사흘 밤을 병원 의자에서 보냈습니다.

옆 가게 순댓집을 하는 이웃 한 씨는 그런 조 씨를 보며 혀를 찼습니다. “형님, 시누이가 셋이나 된다면서 누가 와 보기나 해요?” 조 씨는 웃어넘겼습니다. “다들 먹고살기 바쁘지.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시면 됐어.” 시어머니는 말이 어눌해진 뒤에도 조 씨의 손을 쥐고 “우리 애기, 우리 애기” 하고 불렀습니다.

6년 전 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뒤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남은 건 빚뿐이더라. 그래서 상속은 포기했어. 괜히 신경 쓰지 마.” 조 씨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병원비며 약값이 얼마나 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빚이 남았다니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뒤로 시누이들의 발길은 더 뜸해졌습니다. 명절에도 전화 한 통이 전부였고, 남편이 몸져누웠을 때도 병원에 한 번 다녀간 사람은 큰시누이뿐이었습니다. 조 씨는 서운했지만 남편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떠난 뒤에도 ‘그래도 피붙이니까’ 하며 첫 기일만큼은 함께 모시자고 시누이들에게 미리 연락해 두었습니다.

기일을 열흘 앞둔 시월 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일요일이었습니다. 조 씨는 가게 문을 닫고 안방 장롱 위에 올려 둔 남편의 유품 상자를 내렸습니다. 낡은 점퍼와 돋보기, 손때 묻은 장부 밑에 갈색 서류가방 하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젊은 시절 농협 일을 볼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습니다.

잠금쇠를 열자 노란 고무줄로 묶인 종이 뭉치가 나왔습니다. 은행 송금 영수증이었습니다. 날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두 달 뒤였습니다. 받는 사람 칸에는 시누이 셋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고, 금액은 모두 3000만 원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시어머니 명의의 예금 해지 확인서가 접혀 있었습니다. 해지 금액은 9000만 원이었습니다.

조 씨는 영수증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손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거렸습니다. 빚뿐이라던 어머니의 통장에 9000만 원이 있었고, 남편은 그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누나들에게 나눠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조 씨는 큰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참 신호가 가고 나서야 큰시누이가 받았습니다.

“형님, 어머니 돈 9000만 원 말이에요. 그거 알고 계셨어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더니 큰시누이가 한숨처럼 말했습니다.

“올케가 결국 봤구나. 그거 우리 동생이 그렇게 하자고 한 거야. 엄마 돈은 피 섞인 사람들끼리 나누는 게 맞다고. 올케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 올케는 국밥집도 있고 형편이 낫잖아.”

조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12년 동안 시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고 밤마다 돌아누운 몸을 주물렀던 사람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번 기일에는 오시는 거지요?”

“아유, 그날 내가 손주를 봐 줘야 해서. 둘째랑 막내도 바쁘다더라. 올케가 알아서 잘 지내 줘.”

전화를 끊고 조 씨는 불 꺼진 가게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빗소리가 양철 차양을 두드렸습니다. 서운한 건 돈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산 남편이 그 일을 6년 동안 숨겼다는 것, 그리고 그 돈을 받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동생의 첫 기일조차 외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기일 날, 상 앞에는 조 씨와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 둘뿐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들이 주먹을 쥐었습니다. “엄마, 고모들한테 따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돈을 돌려받자는 게 아니다. 이제 내가 지킬 자리가 어디까지인지 알게 됐을 뿐이야.”

다음 날 조 씨는 시누이 셋에게 똑같은 편지를 부쳤습니다. 영수증 사본 한 장과 함께였습니다. “어머니 12년, 제 도리는 다 했습니다. 이제 시댁 제사는 제가 모시지 않겠습니다. 어머니 제사는 따님들이 모셔 주십시오. 남편 기일은 아들과 둘이 지내겠습니다. 앞으로 저를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시어머니의 은비녀와 한복을 큰시누이 집으로 보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견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은 한쪽에서만 퍼 올리는 우물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그 무게를 모른다면, 주는 사람이 스스로 두레박을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인연을 정리하는 일은 미움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내가 한 도리를 내가 먼저 알아주면, 남은 날들은 조금 더 가벼워집니다.

올해도 장터 골목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세 시, 조 씨의 국밥집 가마솥에서는 여전히 하얀 김이 피어오릅니다. 이웃 한 씨가 셔터를 올리며 “형님, 국물 냄새 좋네” 하고 웃으면, 조 씨도 국자를 든 채 마주 웃습니다. 가게 창 너머로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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