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이 떠나고 나면 사위는 남이 되는 것일까요. 딸이 살아 있을 때는 사위도 자식이라 여기며 살지만, 딸이 없는 자리에서 그 관계가 어떻게 남는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대개 돈과 아이 문제 앞에서 드러납니다.
충청도 작은 도시에 사는 황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스물일곱 해 동안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원으로 일하다 은퇴했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출근해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이고, 여름이면 땀띠가 팔뚝을 덮도록 튀김 앞에 섰습니다. 남편은 열다섯 해 전 지병으로 먼저 떠났고, 황 씨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딸이 결혼하겠다며 사위를 데려온 날을 황 씨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니던 사위는 사과 한 상자를 들고 와서는, 장모 집 부엌의 깜빡이는 형광등을 말없이 갈아 끼웠습니다. “어머님, 이런 건 이제 저 부르세요.” 그 한마디에 황 씨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은 집 문제로 애를 태웠습니다. 사위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둘이 모은 돈으로는 전세 얻기도 빠듯했습니다. 황 씨는 은행에 가서 적금 두 개를 깨고, 퇴직금과 남편이 남긴 보험금 남은 것까지 모았습니다. 모두 1억5000만 원이었습니다.
“엄마, 이건 너무 커. 엄마 노후는 어떡하고.”
“내 노후는 연금으로 된다. 대신 등기는 네 이름으로 해라. 엄마 돈이 들어간 집이니까.”
사위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장모님, 평생 잘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딸 명의로 작은 아파트 한 채가 생겼고, 이듬해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딸이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습니다. 두 해 가까이 병원을 오가는 동안 사위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곁을 지켰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영정 앞에 엎드려 우는 사위를 보며 황 씨는 저 사람이 내 손녀를 잘 키우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떠난 지 한 해가 지나자 사위의 전화가 뜸해졌습니다. 황 씨가 반찬을 싸 들고 찾아가겠다고 하면 “요즘 바빠서요, 다음에 오세요” 하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손녀 생일에 용돈을 보내도 고맙다는 문자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급식실 동료였던 오 씨가 “사위도 살길은 찾아야지” 하고 달랬지만, 황 씨는 손녀가 마음에 걸려 잠을 설쳤습니다.
딸의 3주기는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황 씨는 산 중턱 납골당에 하얀 국화 한 다발을 들고 먼저 올라가 있었습니다. 한참 뒤 손녀가 우산을 쓰고 혼자 계단을 올라왔습니다. 사위는 차에서 통화 중이라고 했습니다.
손녀는 엄마 사진이 든 유리문 앞에 국화를 꽂다가, 할머니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습니다.
“할머니, 저 새엄마랑 다른 동네로 이사 가요. 아빠가 할머니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랬는데….”
황 씨는 손에 든 우산을 떨어뜨렸습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사위의 차 조수석에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사위는 당황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새엄마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작년에 조용히 식만 올렸습니다. 말씀드릴 때를 놓쳐서요.”
“그럼 집은. 그 아파트는 어떻게 됐나.”
사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지난봄에 팔았습니다. 그 돈 보태서 새로 집을 얻었고요. 애 몫은 제가 아빠니까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집은 내 딸 집이고, 저 애 엄마 집이었네.” 황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사위는 더 대꾸하지 않고 손녀를 차에 태웠습니다.
이튿날 황 씨는 주민센터에서 그 아파트의 등기사항증명서를 떼어 보았습니다. 딸이 떠난 뒤 사위와 손녀 앞으로 상속등기가 되었다가, 몇 달 뒤 사위 단독 명의로 바뀌고 곧이어 남에게 팔린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황 씨는 무료 법률 상담을 받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딸에게 자식이 있으니 장모인 황 씨는 상속인이 아니고, 사위와 손녀가 법에서 정한 비율로 나누어 받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미성년 자녀가 함께 상속인일 때는 이해가 부딪치므로, 법원이 정한 특별대리인을 세워 재산 나누기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절차를 거쳤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할머님은 친족으로서 가정법원에 아버지의 재산관리권 문제를 다툴 수 있습니다. 손녀 몫을 따로 지키는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황 씨는 그날로 서류를 준비했습니다. 손녀 몫이 사위의 새집 대출과 생활비에 섞이기 전에 붙들어 두어야 했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가 엄마가 남긴 집마저 모른 채 잃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정리했습니다. 공증 사무실에 가서 지금 사는 집과 남은 예금을 모두 손녀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손녀가 어린 나이에 받게 되면 결국 아버지 손을 거치게 될 것이 걱정되어, 은행 신탁을 통해 손녀가 성년이 된 뒤에 직접 받도록 묶어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네와는 여기까지네. 내 딸 사위 노릇은 이제 안 해도 되네. 다만 손녀는 내 핏줄이니 내가 계속 볼 걸세.”
사위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황 씨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 그 엄마 몫으로 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조부모도 법원에 면접교섭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도 변호사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자식에게 건넨 돈은 돌려받으려고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끝까지 기억해야 합니다. 정에 기대어 말을 아끼는 사이, 지켜야 할 사람의 몫이 조용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관계를 끊는 일은 모질어 보이지만, 때로는 남은 사람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법이 됩니다. 서운함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아직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아이의 내일입니다.
이듬해 봄, 황 씨는 손녀의 손을 잡고 다시 납골당 계단을 올랐습니다. 산벚나무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계단마다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손녀가 엄마 사진 앞에 노란 프리지어를 꽂는 동안, 황 씨는 그 작은 어깨 너머로 오래도록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