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12:34

“시어머니 수술비 700만원 대줬는데..” 법무사 사무실에서 드러난 시누이들의 민낯

부모가 늙고 병들면 누군가는 그 곁을 지켜야 합니다. 대개는 가까이 사는 자식이, 그중에서도 맏며느리가 그 짐을 떠안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떠나고 나면 곁을 지킨 세월보다 남은 재산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경상도 바닷가 소도시에 사는 신 씨는 올해 예순입니다. 남편과 함께 28년째 시장 어귀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기계를 돌려 떡을 찌고, 명절 대목에는 고춧가루를 빻고 참기름을 짜느라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셔터를 내립니다. 아들과 딸은 결혼해 도시로 나갔고, 지금은 예순넷 남편과 둘이 방앗간 뒤 살림집에서 지냅니다.

신 씨는 스물여섯에 시집왔습니다. 시어머니는 말수가 적고 깐깐한 분이었습니다. 처음 김장하던 날 배추를 너무 짜게 절였다며 한 통을 통째로 다시 씻게 하셨고, 신 씨는 그날 밤 찬물에 언 손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첫아이를 낳았을 때 시어머니는 미역국을 손수 끓여 들고 와서는 “애썼다” 한마디만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신 씨는 그 국 한 그릇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남편 아래로는 여동생이 둘 있었습니다. 큰시누이는 수도권에서 학원을 했고, 작은시누이는 남편 직장을 따라 인근 대도시에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명절에도 차례가 끝날 즈음에야 얼굴을 비추고 저녁도 먹기 전에 일어서곤 했습니다.

6년 전 봄, 혼자 시골집에 사시던 시어머니가 마당에서 쓰러지셨습니다. 가벼운 뇌경색이었지만 그 뒤로 오른손을 잘 쓰지 못하셨습니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큰시누이가 먼저 말했습니다. “오빠네가 제일 가깝잖아. 언니가 좀 맡아 줘. 우리는 돈이라도 보탤게.”

신 씨는 시어머니를 방앗간 뒤 살림집으로 모셨습니다. 시누이들이 보탠다던 돈은 처음 몇 달만 들어오다 끊겼습니다. 신 씨는 새벽에 떡을 쪄 놓고 들어와 시어머니 기저귀를 갈았고, 점심때면 가게를 남편에게 맡기고 죽을 떠먹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날그날 어머님 상태를 공책에 적었습니다. 혈압, 드신 양, 약 먹은 시간, 손 떨림 정도까지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보여 드리려고 시작한 기록이 어느새 여섯 권이 되었습니다.

3년 전 겨울에는 시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습니다. 수술비와 입원비로 700만 원이 나왔습니다. 신 씨가 전화를 걸자 큰시누이는 한숨부터 쉬었습니다. “언니, 요즘 학원이 어려워서. 어차피 엄마 집이랑 땅은 모시는 오빠네가 받을 텐데, 그걸로 생각하면 되잖아.” 작은시누이는 “형님, 남편한테 말해 볼게요” 하더니 다시 연락이 없었습니다.

신 씨는 방앗간 수입을 쪼개 3년 넘게 부어 온 적금을 깼습니다. 손녀가 대학에 들어가면 보태 주려던 돈이었습니다. 남편은 병원 복도에서 아내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수술 뒤로 시어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을 잃으셨습니다. 손 떨림이 심해져 숟가락을 쥐지 못하셨고, 나중에는 볼펜으로 이름 석 자를 쓰는 것도 힘겨워하셨습니다. 그렇게 3년을 더 버티시다 올여름, 신 씨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두 시누이는 누구보다 크게 울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한 달 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명의로 된 시골집과 논 두 마지기를 정리하려고 삼남매가 읍내 법무사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신 씨는 남편을 따라나서며 장바구니에 간병일지 여섯 권을 담았습니다. 병원비 영수증이 그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무사 윤 씨가 상속 서류를 설명하려던 참에 큰시누이가 가방에서 누런 봉투를 꺼냈습니다. “잠깐만요. 엄마가 남기신 게 있어요. 집이랑 땅은 딸들한테 주라고 직접 쓰셨어요.”

봉투 안에는 줄 쳐진 편지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이름과 주소, ‘시골집과 논은 두 딸에게 반씩 준다’는 문장 아래 날짜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습니다.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엄마가 이걸 언제….”

“오빠네는 엄마 모신다고 그동안 엄마 통장도 관리했잖아. 그걸로 된 거지.” 큰시누이는 팔짱을 꼈습니다. 작은시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손톱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신 씨는 편지지 아래 날짜를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재작년 사월 아흐레였습니다. 신 씨는 말없이 장바구니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그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법무사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4월 9일. 비. 어머님 아침부터 손 떨림 심함. 숟가락 놓치심. 죽 세 숟가락 떠 드림. 오후 내내 주무심. 찾아온 사람 없음.]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신 씨는 앞뒤 장을 천천히 넘겼습니다. 그 무렵 일지에는 어머님이 볼펜을 쥐지 못해 주민센터 서류에 서명 대신 지장을 찍으셨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편지지 속 글씨는 반듯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법무사 윤 씨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습니다. “자필 유언장은 내용과 날짜, 주소, 이름을 모두 본인이 직접 써야 효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썼다면 유언으로 인정받을 수 없고, 사안에 따라서는 문서 위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유언장은 법원 검인 절차도 거쳐야 하고요.”

그때 작은시누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언니, 이제 그만해. 형님, 죄송해요. 장례 끝나고 언니가 엄마가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 엄마 글씨를 흉내 내서 썼어요. 날짜는 엄마 살아 계실 때로 거꾸로 적고요. 저는 말리지도 못하고….”

큰시누이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탁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6년 동안 엄마 숟가락 한 번 들어 드린 적 없는 사람이, 엄마 손을 빌려 이걸 썼구나.”

신 씨는 남편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큰시누이에게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고모, 저는 집도 땅도 바라지 않았어요. 수술비 700만 원도 받을 생각 없었고요. 그런데 어머님이 쓰지도 못하신 글을 어머님 것이라고 하면, 그건 제가 못 넘어가요. 6년 동안 제가 곁에서 본 어머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으니까요.”

그날 편지지는 그 자리에서 거둬들여졌습니다. 상속은 법대로 삼남매가 똑같이 나누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고소 이야기를 꺼냈지만 신 씨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대신 수술비와 장례비를 먼저 정산하고, 시골집은 팔지 말고 제사 지낼 곳으로 남겨 두자고 했습니다. 큰시누이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사무실을 나서는데 작은시누이가 신 씨를 붙잡았습니다. “형님, 그 공책 한 권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엄마 마지막을 저는 하나도 몰라서요.” 신 씨는 마지막 권을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어머님 정신이 맑던 어느 날의 말씀도 적혀 있었습니다. [딸들 보고 싶다고 하심. 큰애 학원 잘되나 물으심.]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긴 병 곁에는 대개 말없이 버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시간은 통장에도 등기부에도 남지 않지만, 하루하루 적어 둔 기록은 거짓을 밀어내는 힘이 됩니다.

부모의 재산은 떠난 뒤에 나누지만, 부모를 모시는 마음은 살아 계실 때 나누는 것입니다. 남은 것을 두고 다투기 전에, 그 곁을 지킨 사람이 누구였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올가을 신 씨 부부는 방앗간 문을 하루 닫고 시골집에 다녀왔습니다. 마당의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툇마루에는 어머님이 쓰시던 방석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신 씨는 감을 몇 개 따서 바구니에 담으며, 내년 제사 때는 두 시누이도 이 마루에 함께 앉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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