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3 09:09

“30년 친구에게 2500만원 줬는데..” 4년 뒤 칠순 잔치에서 들은 한마디에 결단했다

오래 사귄 친구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모른 척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십 년 같은 산길을 걸어온 사이라면 서류나 약속보다 그 세월을 먼저 믿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형편이 바뀌면 함께 바뀌기도 합니다.

정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경상도의 한 소도시 공단 입구에서 35년째 작은 자동차 정비소를 하고 있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하루 열 대 넘는 차 밑을 드나들며 아내와 함께 1남 1녀를 키워 출가시켰습니다. 지금은 시내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아내와 단둘이 삽니다.

정 씨에게는 30년 지기 등산 친구 한 씨가 있습니다. 같은 동 아래층에 사는 한 씨는 정 씨와 동갑으로, 철물 도매상에서 일하다 은퇴했습니다. 두 사람은 일요일마다 새벽 다섯 시에 아파트 앞에서 만나 뒷산을 올랐고, 열댓 명이 모이는 등산 모임도 함께 꾸렸습니다.

정이 깊어진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20년 전 겨울 산행에서 정 씨가 빙판에 미끄러져 발목이 부러졌을 때, 한 씨가 정 씨를 업고 두 시간을 걸어 내려왔습니다. 정비소에 불이 나 공구를 다 잃었을 때도 한 씨는 창고에서 쓸 만한 공구를 챙겨다 주었습니다. 정 씨는 그 일을 두고두고 고마워했습니다.

4년 전 봄, 한 씨가 정비소로 찾아왔습니다. 작업대 옆 낡은 소파에 앉아 한참 뜸을 들이던 한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한테 이런 말 하기 부끄러운데, 아들놈 식당이 무너지게 생겼네. 장사가 안돼서 진 빚이 2500만 원인데, 이번 달에 못 막으면 가게를 내놔야 한다네.”

정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만한 돈이 어디 있는지는 정 씨만 알았습니다. 정비소를 접고 나면 아내와 쓰려고 10년 동안 가게 수입에서 다달이 떼어 부어 온 퇴직 적금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통장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언젠가 아내 앞에 내밀며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아들이 자리 잡으면 꼭 갚겠네.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하겠나.” 한 씨가 정 씨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정 씨는 다음 날 은행에 가서 적금을 깼습니다. 차용증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30년 친구에게 종이를 내미는 일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돈을 보낸 그날 밤 한 씨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고맙네 친구. 이 은혜 꼭 갚겠네.]

그 뒤로 4년이 흘렀습니다. 한 씨는 산에서 만날 때마다 먼저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들 가게가 아직 영 시원찮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정 씨는 그때마다 “됐네, 천천히 하게” 하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릎이 시큰거리는 날이면 깨 버린 적금 생각에 다시 리프트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아내가 “당신 이제 좀 쉬어요” 해도 정 씨는 대답 대신 공구를 챙겼습니다.

지난달 한 씨의 칠순 잔치가 열렸습니다. 가을비가 그친 토요일 점심, 시내 한정식집 연회장에 등산 모임 사람들까지 쉰 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정 씨는 아내와 함께 30만 원을 넣은 봉투를 들고 갔습니다.

식당 앞마당에는 번쩍이는 검은색 외제 세단이 서 있었습니다. 앞 유리에는 아직 임시 번호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씨가 하객들 앞에서 차 열쇠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아들이 칠순 선물이라고 뽑아 줬네. 가게가 손님으로 미어터진다지 뭔가. 벌써 2년째 줄 서서 먹는 집이야.”

정 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바로 지난주 산 중턱에서도 한 씨는 “아들 가게 월세가 밀렸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내가 정 씨의 팔을 슬쩍 잡았습니다. “여보, 얼굴이 왜 그래요?” 정 씨는 “체했나 보네”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정 씨는 화장실에 갔습니다. 손을 씻고 나오려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한 씨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임 사람 하나가 묻고 있었습니다. “정 씨 돈은 다 갚았나? 그때 꽤 큰돈이었다면서.”

한 씨가 껄껄 웃었습니다. “그 영감 돈은 원래 갚을 필요 없는 돈이야. 저 혼자 좋아서 준 거지. 차용증도 없는데 뭘 갚아. 앓는 소리 한 번이면 그냥 넘어가는 양반이야.” 정 씨는 화장실 문손잡이를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30년을 들어 온 웃음소리가 그렇게 낯설 수 없었습니다.

정 씨는 자리로 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고 먼저 일어났습니다. 한 씨가 “벌써 가나?” 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정 씨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정 씨는 아내를 식탁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부은 적금과 4년 전 일, 화장실 앞에서 들은 말까지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한참 말이 없다가 정 씨의 손등을 꼬집었습니다. “무릎 아프다면서 가게 못 접은 게 그 때문이었어요?” 정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내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습니다. “속상한 건 나중에 해요. 받을 건 받아야지요. 그건 우리 노후 돈이에요.”

다음 날 아내는 4년 전 문자를 찾아냈고, 정 씨는 은행에서 이체 내역을 뽑았습니다. 법률 상담을 받아 보니 차용증이 없어도 송금 기록과 갚겠다는 문자가 빌려준 돈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습니다. 상대가 받고 2주 안에 이의를 내지 않으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서류를 받은 한 씨가 그날 저녁 현관 앞에 찾아왔습니다. “친구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 말로 하면 될 걸.” 정 씨는 문을 반쯤만 열고 대답했습니다. “말로 4년을 기다렸네. 자네가 화장실 앞에서 한 말, 나도 다 들었네.” 한 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한 씨는 끝내 이의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돈을 어떻게 빌렸는지 뒤늦게 알게 된 한 씨의 아들이 한 달 만에 2500만 원을 정 씨 통장에 넣었습니다. 정 씨는 그 주에 등산 모임 단체 대화방에서 조용히 나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씨와 마주쳐도 정 씨는 층수 버튼만 바라보았습니다.

정 씨는 돌려받은 돈으로 정비소를 정리했습니다. 35년 쓴 공구는 일을 배우던 젊은 정비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내는 그 돈을 부부 이름으로 나누어 넣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집 돈은 둘이 같이 알기로 해요.” 정 씨는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이솝 우화의 농부는 얼어 죽어 가던 뱀을 품에 넣어 녹여 주었다가 그 뱀에게 물리고 맙니다. 베푼 마음이 크다고 해서 받는 사람이 그 무게를 똑같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 큰돈이 오갈 때는 서운해하지 말고 차용증 한 장, 문자 한 줄이라도 남겨 두세요. 그리고 그 돈을 함께 모은 사람에게는 먼저 털어놓으세요. 기록은 돈을 지켜 주고, 털어놓는 일은 부부의 믿음을 지켜 줍니다.

올가을 정 씨는 아내와 처음으로 둘만의 산행을 나섰습니다. 새벽 다섯 시가 아니라 해가 넉넉히 오른 아침, 뒷산 대신 남쪽 바닷가 둘레길을 골랐습니다. 억새가 은빛으로 흔들리는 언덕 너머로 잔잔한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정 씨는 아내의 배낭까지 메고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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