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4 13:57

“친정엄마 간병비 8000만원 댔는데..” 4개월 뒤 작은오빠가 내민 계산서에 귀를 의심했다

부모가 아프면 누군가는 곁을 지켜야 합니다. 형제가 여럿이어도 그 짐은 결국 한 사람이 떠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은 부모가 떠난 뒤에야 형제들이 그 세월을 어떻게 셈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

충청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최 씨는 올해 쉰아홉입니다. 시장 입구 약국에서 22년째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약을 봉투에 담고 처방전을 정리하고, 어르신들께 복용법을 몇 번이고 다시 일러 드리는 것이 최 씨의 일입니다. 남편은 15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외동딸은 결혼해 수도권에서 삽니다.

최 씨는 삼 남매의 막내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읍내 장터에서 국밥집을 하며 삼 남매를 키웠습니다. 큰오빠는 대학까지 갔지만 최 씨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국밥집 일을 거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미안해했습니다. “막내야, 너도 공부 욕심이 많았는데.”

어머니가 국밥집을 접던 날, 최 씨는 새벽까지 남아 솥을 닦았습니다. 오빠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에도 짐을 싸고 푼 사람은 최 씨였습니다. 어머니는 새 집 베란다에 앉아 최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 집은 나중에 너희 셋이 공평하게 나눠라.”

8년 전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가스 불을 켜 둔 채 잊는 정도였지만, 점점 한밤중에 맨발로 아파트 복도를 헤매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삼 남매가 모인 자리에서 큰오빠는 회사 일을 꺼냈고 작은오빠는 아이들 학원비 이야기를 했습니다. “막내 너는 혼자니까 엄마 집에 들어가 사는 게 낫지 않겠니.”

이듬해 최 씨는 살던 전셋집을 빼고 어머니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약국 일은 오전만 나가는 것으로 줄였습니다. 오후에는 간병인을 불렀고, 그 비용은 최 씨가 냈습니다. 오빠들은 “형편 되는 대로 보탤게” 했지만, 7년 동안 보내온 돈은 명절 용돈 몇 번이 전부였습니다.

4년 전에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쳤습니다. 수술 뒤에는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건강보험이 되지 않는 간병비에 기저귀값과 약값까지 더하면 다달이 백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최 씨는 남편 사망 보험금으로 들어 둔 적금을 깼고, 딸 결혼 때 쓰고 남은 돈까지 헐었습니다. 7년 동안 최 씨가 쓴 돈은 8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요양병원에는 간호조무사 윤 씨가 있었습니다. 최 씨보다 다섯 살 아래인 윤 씨는 어머니를 “우리 어머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밤새 소리를 지르면 곁에서 옛날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최 씨가 늦게 오는 날이면 어머니 손톱을 깎고 머리를 곱게 빗겨 두었습니다.

오빠들은 7년 동안 병원에 손꼽을 만큼 왔습니다. 와서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3년 전 봄, 두 오빠가 드물게 함께 병원에 온 날이 있었습니다. 최 씨가 약국에서 돌아왔을 때 오빠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고, 어머니는 침대에서 “도장, 도장”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최 씨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올해 7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밤 곁을 지킨 사람은 최 씨와 윤 씨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 최 씨는 빈 아파트에서 어머니 옷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서랍 깊은 곳에서 은가락지 하나가 나왔습니다. 국밥집에서 칼을 쥐던 어머니 손가락에 늘 끼여 있던 가락지였습니다.

지난주, 오빠들이 유산을 정리하자며 최 씨를 법무사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최 씨가 우산을 접고 들어서자 긴 탁자 위에 등기부 등본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법무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습니다. “어머님 아파트는 3년 전에 큰아드님 앞으로 증여 등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누실 재산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최 씨는 3년 전 봄 어머니가 중얼거리던 “도장, 도장”이 떠올랐습니다.

큰오빠는 최 씨의 눈을 피했습니다. “엄마가 정신 있을 때 장남한테 주신 거다.” 최 씨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작은오빠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남은 건 시골 땅 조금이랑 예금이야.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너 엄마 집에서 7년 공짜로 살았잖아. 월세 50만 원씩 치면 4200만 원이다. 이거 빼고 나누자.” 최 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계산서에는 볼펜으로 줄이 반듯하게 그어져 있었습니다. 월세 4200만 원, 관리비 몇백만 원. 최 씨가 쓴 간병비 8000만 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빠, 내가 엄마 간병하느라 쓴 돈은요?” 작은오빠가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건 자식 도리지. 너만 자식이냐.”

창밖으로 빗줄기가 굵어졌습니다. 맨발로 복도를 헤매던 어머니를 업고 들어오던 새벽과 밤마다 기저귀를 갈던 7년이 종이 한 장 위에서 월세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장례 뒤 약국 약사 한 씨는 최 씨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 “정신이 흐린 분이 해 준 증여라면 다퉈 볼 여지가 있대요. 유류분을 청구할 수도 있고, 7년 간병한 건 기여분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던데요. 변호사 한번 만나 봐요.” 최 씨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 씨는 고개를 들고 법무사에게 말했습니다. “남은 땅이랑 예금, 제 몫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서류를 만들어 주세요.” 작은오빠가 놀란 얼굴로 최 씨를 쳐다보았습니다. 최 씨는 법무사가 내민 상속재산 분할 협의서에 자기 몫을 비워 둔 채 또박또박 이름을 썼습니다.

서명을 마친 최 씨는 두 오빠를 차례로 바라보았습니다. “엄마는 셋이 공평하게 나누라고 하셨어요. 나는 엄마 곁에 있던 7년을 받았으니 그걸로 됐어요. 그 대신 오늘부터 오빠들한테 나는 없는 동생이에요. 엄마 제사는 오빠들이 지내세요.” 최 씨는 우산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따라 나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한 씨는 속상해했습니다. “소송했으면 몇천만 원은 돌려받았을 수도 있는데.” 최 씨는 웃었습니다. “몇 년씩 법원 드나들며 오빠들 얼굴 보는 게 더 큰 손해예요. 엄마 보내 드리는 마지막 일까지 싸움으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주말 최 씨는 요양병원을 찾아가 손수건에 싼 은가락지를 윤 씨에게 건넸습니다. “엄마가 끼던 거예요. 엄마 마지막 7년을 같이 지켜 준 사람은 오빠들이 아니라 선생님이에요.” 윤 씨는 가락지를 쥐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어머님이 밤마다 막내딸 언제 오냐고 물으셨어요.”

최 씨는 오빠 명의가 된 아파트를 비우고 약국 근처에 작은 원룸을 얻었습니다. 약국 일도 다시 종일 나가기로 했습니다. 딸은 전화로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엄마 인생 살아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긴 병 곁에 끝까지 남는 자식은 있고, 그런 자식은 대개 셈을 하지 않습니다. 셈을 하는 쪽은 곁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부모를 돌보는 일은 돈으로 따질 수 없지만, 형제 사이의 약속은 미리 글로 남겨 두는 편이 좋습니다. 간병비는 누가 얼마나 낼지, 부모님 재산은 어떻게 할지 부모님 정신이 맑을 때 함께 이야기해 두세요. 그래야 부모님이 떠나신 뒤에 형제 사이의 정까지 잃지 않습니다.

지난 일요일, 최 씨는 윤 씨와 함께 어머니를 모신 산자락 추모공원에 올랐습니다. 비탈길에는 젖은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옅은 초겨울 햇살이 내려앉았습니다. 윤 씨의 손가락에서 은가락지가 작게 반짝였습니다. 두 사람은 어머니 앞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해가 기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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