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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돌아온 날, 집 안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지나면 빈자리보다 남은 것들이 더 무겁게 느껴지지요. 서랍 속 물건 하나, 밤마다 되풀이되는 생각 하나가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몸은 새 삶으로 옮겨 왔는데 마음은 여전히 예전 집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승려이자 수필가였던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으로 많은 이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 책에서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가려내라는 뜻이지요. 이혼 뒤의 삶에도 이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혼 후 비워야 할 것들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4위 – 손이 갈 때마다 아픈 물건
결혼 생활의 흔적이 밴 물건은 생각보다 오래 마음을 붙잡습니다. 함께 고른 찻잔, 여행지에서 산 액자, 옷장 한쪽에 남은 낡은 외투 같은 것들이지요.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면 그 물건은 이미 쓰임을 다한 것입니다.
다만 무소유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듯, 무조건 다 치울 필요는 없습니다. 자녀에게 의미가 있는 사진이나 앞으로의 생활에 꼭 필요한 서류는 남겨 두셔도 좋습니다. 기준은 하나입니다.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물건인지, 지난날에 묶어 두는 물건인지만 물어보시면 됩니다.
3위 – 끝나지 않는 손익 계산
“내가 그 집에 얼마나 헌신했는데”, “그 시간이면 다른 걸 했을 텐데” 하는 계산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재산을 나누는 일은 법과 절차에 맡기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속 장부는 누구도 대신 정리해 주지 않지요.
지나간 세월을 손해로만 적어 두면 그 장부는 평생 적자로 남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도 배운 것과 지켜 낸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셈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2위 – 남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
명절에 친척을 만나는 일이 두렵고, 동창 모임에 나가기가 망설여진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 수군거리지 않을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요.
하지만 남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남의 시선에 맞춰 설명할 말을 미리 준비하느라 쓰는 기운은 내 삶에 꼭 필요한 기운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도 내 삶을 지키는 한 방법입니다.
1위 – 나를 향한 끝없는 자책
가장 먼저 비워야 하지만 가장 늦게까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다” 하는 자책입니다. 물건은 버리면 사라지고 남의 시선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집니다. 하지만 자책은 내 안에서 스스로 자라나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지요.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해 주니까요. 그러나 반성이 자기 비난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불필요한 짐이 됩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무소유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면, 이혼 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불필요한 것은 바로 나를 몰아세우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 작은 수첩 한 권을 꺼내 보시기를 권합니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자책의 말을 한 줄 적고, 그 옆에 오늘 내가 해낸 일 하나를 적어 보십시오. 끼니를 챙겨 먹은 일, 산책을 다녀온 일처럼 작은 것이어도 충분합니다.
일주일만 이어 가 보시면 수첩의 오른쪽 칸이 왼쪽 칸보다 길어지는 날이 옵니다. 비운다는 것은 그렇게 한 줄씩 덜어 내고 한 줄씩 채우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