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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석 달이 지났는데, 오늘이 며칠인지 바로 대답할 수 있는가? 머뭇거렸다면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회의와 마감과 약속에 맞춰 움직이던 머리가 출근이 끊긴 다음 날부터 할 일을 잃는다. 그 변화는 소리 없이 와서 본인은 잘 알아채지 못한다.
신경과 진료실에서 은퇴 첫해의 생활 변화를 눈여겨보라고 당부하는 것도 그래서다. 쉬는 게 당연하고 편한 게 보상처럼 느껴지는 시기에 나도 모르게 자리 잡는 습관 네 가지를 정리했다.
4위. 알람을 끄고 하루 일정을 비워 두는 것
마지막 출근 다음 날 알람부터 껐다. 느지막이 일어나 신문을 넘기고, 점심을 먹고 나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켠다. 그러다 남편이 “오늘 무슨 요일이지?” 하고 묻자 아내는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니?” 하고 웃으며 되묻는다. 웃음은 금방 끝나고 속은 철렁하다. 날짜를 놓쳤다는 것은 남편의 하루에 기준이 없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일과가 있으면 머리는 매일 계획을 세우고 순서를 정한다. 일정이 사라지면 그 일도 같이 사라진다. 출근하던 때만큼은 아니어도 일어나는 시간은 정해 두는 편이 낫다. 잠들기 전에 다음 날 할 일 두세 가지를 종이에 적어 두면 하루에 뼈대가 생긴다.
3위. 하루 대화 상대가 배우자 한 명뿐인 것
직장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과 말을 섞었다. 이제는 “밥 먹읍시다”와 “불 끕시다” 사이에 오가는 몇 마디가 대화의 전부다. 부엌까지 따라와 말을 거는 남편에게 아내는 “당신 오늘 나 말고 누구랑 얘기했어요?”라고 묻는다. 타박처럼 들려도 속에 담긴 것은 걱정이다. 남편의 하루가 자기 한 사람에게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느껴진다.
같은 사람과만 이야기하면 화제도 쓰는 단어도 점점 줄어든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듣고 받아치는 일에는 생각보다 머리가 많이 쓰인다. 동창 모임이든 동네 걷기 모임이든 주민센터 강좌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말할 자리를 만들어 두는 편이 부부 사이에도 낫다.
2위. 길 찾기와 계산을 전부 휴대폰에 맡기는 것
주말에 딸과 장을 보던 아버지가 물건값 두어 개를 더하려고 휴대폰 계산기부터 연다. 딸이 “아빠, 이 정도는 그냥 머리로 하셨잖아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이게 편하다며 웃는다. 딸은 그 웃음을 보면서 아버지가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처음 느낀다.
길을 떠올리고 숫자를 굴리는 동안 머리는 기억하고 판단하는 일을 함께 한다. 기계에 모두 맡기면 그 연습을 할 기회도 통째로 넘겨주게 된다. 휴대폰을 멀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자주 가는 곳은 지도 없이 먼저 가 보고, 장을 볼 때는 합계를 어림해 둔 뒤 영수증과 맞춰 보는 정도면 된다.
1위. 늘 가던 곳만 오가는 것
아내가 “새로 생긴 도서관 한번 가 볼까요?” 하고 물으면 남편은 “거기 가서 뭐 해, 공원이나 한 바퀴 돌자”고 답한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다음에는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더 망설이게 된다. 남편의 하루는 집과 공원과 단골 식당 사이에서 점점 좁아진다.
낯선 곳에 가면 길을 찾고 분위기를 살피고 처음 보는 것을 이해하느라 머리가 바빠진다. 다니는 범위가 좁아지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습관도 함께 굳어지기 쉽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처음 가 보는 시장이나 전시를 일정에 넣어 두면 된다. 아내가 먼저 꺼낸 제안이라면 더 좋다.
은퇴는 일을 내려놓는 것이지 머리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거창한 결심까지는 필요 없다. 내일 아침 알람 하나, 이번 주 약속 하나, 처음 걸어 보는 길 하나면 충분하다. 머리는 쓸 일이 있어야 움직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