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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상은 한 사람을 위해 차리는 밥상입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혼자 사는 사람에게 남이 차려 준 생일상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상을 차려 준 사람은 그 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받은 사람도 바쁘게 살다 보면 그 고마움을 전할 때를 놓치곤 합니다.
강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어느 지방 국립대 정문에서 언덕길을 따라 십 분쯤 올라가는 골목에서 40년 동안 하숙을 쳤습니다. 방 여섯 칸짜리 2층 양옥집이었고, 마당에는 시집올 때 심은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남편은 15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수도권에서 회사를 다니고, 딸은 바닷가 도시로 시집가 손녀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하숙집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쌀을 씻어 밥솥 두 개에 안치고, 국을 끓이고, 반찬 서너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저녁에는 시험 기간이라며 늦게 들어오는 학생들 몫으로 밥을 따로 덮어 두었습니다. 강 씨의 손등에는 40년 동안 생긴 크고 작은 데인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 씨에게는 하숙을 시작한 첫해부터 지켜 온 규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숙생 생일이면 새벽에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무쳐 따로 상을 차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하숙을 받던 해, 섬에서 올라온 공대생 하나가 생일날 아침에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았습니다.
“아주머니, 오늘 제 생일인데요. 집 떠나 미역국 못 먹는 생일은 처음이라서요.”
그 말이 강 씨의 마음에 오래 걸렸습니다. 그날 저녁 강 씨는 부랴부랴 미역을 불려 국을 끓여 주었고, 다음 날 문방구에서 공책 한 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하숙생이 들어올 때마다 이름과 생일을 적었습니다.
“생일 미역국은 엄마가 끓여 주는 거라는데, 여기 있는 동안은 내가 엄마다.”
미역은 바닷가 시장에서 돌미역을 한 단씩 사다 썼습니다. 들기름에 미역을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국간장으로만 간을 하는 것이 강 씨의 방식이었습니다. 소고기를 넉넉히 넣지 못하는 달에는 홍합을 넣었습니다. 하숙비를 올리지 않는 대신 장을 볼 때 한 번 더 값을 깎았고, 잡채에 넣을 시금치는 마당 한쪽 텃밭에서 길렀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친 해에는 아버지 사업이 망해 석 달 치 하숙비를 내지 못한 법대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짐을 싸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강 씨는 짐 가방을 도로 방에 밀어 넣으며 말했습니다. “밥은 먹고 공부해야지. 돈은 나중에 벌어서 줘.” 그 학생의 생일에도 미역국은 어김없이 올라왔습니다. 학생은 국그릇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생일 공책은 세 권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이백 개가 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학가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학생들은 혼자 지내는 원룸을 찾았고, 밥은 편의점과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습니다. 방 여섯 칸은 하나씩 비어 갔습니다. 졸업한 하숙생들은 처음 몇 해는 명절에 안부 전화를 했지만,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강 씨는 서운해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다들 제 살기 바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겨울밤이면 생일 공책을 꺼내 이름을 하나씩 짚어 보곤 했습니다. 이 아이는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아직도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들은 몇 해 전부터 하숙을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엄마, 무릎도 안 좋으신데 이제 그만 쉬세요.” 강 씨는 마지막 하숙생이 졸업할 때까지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올해 시월 마지막 날 아침, 그 마지막 하숙생이 짐을 쌌습니다. 취업한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간다고 했습니다. 강 씨는 학생이 탄 승합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대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날은 하루 종일 가는 비가 내렸습니다. 강 씨는 빈방들을 돌며 이불을 개고 창문을 닦았습니다. 부엌에는 40년 동안 쓴 큰 들통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저 들통에 국을 끓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저녁밥은 혼자 먹을 만큼만 지었습니다.
저녁 일곱 시쯤 대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아들이 온다는 연락은 없었기에 강 씨는 의아한 얼굴로 대문을 열었습니다.
비가 그친 골목에 우산을 접어 든 중년 사내와 여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언덕 아래까지 스무 명이 넘어 보였습니다. 희끗한 머리, 배가 나온 양복 차림, 아이 손을 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두 손에 냄비를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맨 앞에 선 사내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주머니, 저 기억하세요. 하숙비 석 달 밀렸던 법대생입니다.”
강 씨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선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섬에서 온 공대생이요. 아주머니가 처음 미역국 끓여 주신 그 녀석입니다.”
법대생이던 사내는 이제 쉰 중반의 최 씨라는 변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최 씨가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2년 전 우연히 이 골목을 지나다 하숙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동문회 명부와 옛 동기들을 뒤져 하숙생들의 연락처를 하나씩 모았습니다. 해외에 나간 사람, 소식이 끊긴 사람까지 찾아내느라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마지막 날만큼은 저희가 상을 차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손맛을 흉내 낼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강 씨는 맨 앞 냄비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들기름 냄새가 훅 올라왔습니다. 미역국이었습니다. 다음 냄비에는 홍합이 들어 있었고, 그다음 냄비에는 소고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마다 기억을 더듬고 서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쌀뜨물에 국간장만 넣는 방식을 맞춰 보았다고 했습니다. 몇 번을 끓여 버렸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섬에서 온 공대생이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저희 생일을 이백 번도 넘게 챙기셨는데, 저희는 아주머니 생신을 한 번도 몰랐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을 아주머니 생일로 정했습니다.”
그날 밤 하숙집 마루에는 상 다섯 개가 펼쳐졌습니다. 스무 개가 넘는 냄비의 미역국이 강 씨 앞에 한 그릇씩 놓였습니다. 강 씨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모금씩 떠먹었습니다. 어떤 국은 조금 짰고, 어떤 국은 미역이 덜 볶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강 씨에게는 40년 동안 끓인 어떤 국보다 따뜻했습니다. 강 씨는 국그릇을 내려놓고 끝내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강 씨는 방에서 생일 공책 세 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옛 하숙생들은 공책에 적힌 자기 이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고 울었습니다.
남에게 차려 준 밥상은 금방 비워지고 잊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국을 끓였다는 기억은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 기억은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의 밥상으로 돌아옵니다.
정성은 돈처럼 장부에 적히지 않습니다. 돌려받을 날짜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귀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넨 마음이 쌓이면,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지켜 주는 가장 든든한 재산이 됩니다.
십일월 들어 마당의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강 씨는 대문 옆에 앉아 생일 공책 맨 뒷장에 새로 적힌 이름 하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옛 하숙생들이 적어 두고 간 강 씨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언덕길 아래로 하교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늦가을 바람에 실려 올라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