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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를 놓는 사람에게 좋은 세입자는 복이고, 세 든 사람에게 좋은 집주인은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한 지붕 아래 오래 살다 보면 계약서보다 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으로 깎아 준 돈이 고마움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쌓이는 일도 있습니다.
박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경상도의 한 소도시에서 33년 동안 시내버스 정비사로 일했습니다. 기름때 묻은 손으로 모은 돈에 퇴직금을 보태 반지하가 딸린 2층 집을 지은 것이 15년 전입니다. 1층에는 박 씨 부부가 살고, 2층과 반지하는 세를 놓았습니다. 외동딸은 결혼해 수도권에 삽니다.
12년 전 봄, 2층에 최 씨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남편은 택배 기사였고 아내는 식당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을 안고 온 부부는 보증금이 모자라 쩔쩔맸습니다. 박 씨는 월세를 50만 원으로 정하고 보증금도 절반만 받았습니다.
이듬해 겨울, 최 씨의 택배 트럭이 새벽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박 씨는 공구통을 들고 나가 언 손을 녹여 가며 두 시간 만에 차를 고쳤습니다. 부품값만 받고 공임은 한사코 받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박 씨의 아내가 미역국을 한 솥 끓여 계단을 올랐습니다.
6년 전에는 최 씨 아내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월세 봉투를 내밀며 고개를 숙이는 부부에게 박 씨가 말했습니다. “애들 신발값 아껴서 월세 내지 마시오. 집은 안 도망가요.” 그 뒤로 넉 달 동안 박 씨는 월세를 절반만 받았습니다. 최 씨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사장님, 저희 평생 이 집에서 살 거예요.”
그사이 동네 월세는 해마다 올라 비슷한 집이 100만 원 가까이 되었습니다. 연금에 월세를 보태 사는 박 씨 부부에게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박 씨는 재계약 때마다 같은 금액을 적었습니다. 12년 동안 덜 받은 돈은 어림잡아도 4,000만 원 가까이 되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2층 부부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마주쳐도 인사가 짧아졌고, 골목에는 번쩍이는 새 차가 서 있었습니다. 박 씨는 서운했지만 형편이 나아졌나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올여름 박 씨는 가슴 통증으로 쓰러져 심장 혈관 시술을 받았습니다. 보일러를 손보고 옥상 방수를 챙기는 일이 이제는 버거웠습니다. 딸이 울며 말했습니다. “아빠, 이제 집 정리하고 우리 근처로 오세요.” 박 씨는 집을 팔기로 하고, 계약 만료 넉 달 전에 2층 부부에게 사정을 알렸습니다. 부부는 이미 계약갱신요구권을 한 번 쓴 터였습니다.
시월 끝자락,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였습니다. 시장 입구 부동산 사무실에는 석유 난로가 웅웅 돌았고, 탁자 위에는 매매 계약서와 인주가 놓여 있었습니다. 박 씨가 도장을 막 집어 들었을 때, 문이 열리며 최 씨 부부가 들어섰습니다.
최 씨가 젖은 우산을 접으며 흰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겉봉에 ‘내용증명’이라는 네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장님, 저희 그냥은 못 나갑니다. 이사비하고 위로금 4,000만 원 주시면 비워 드리겠습니다.”
박 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매수인이 놀라 중개사를 쳐다보았습니다. “집 비우는 문제가 있는 집이에요?” 최 씨 아내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년 산 사람을 갈 데도 없는데 내쫓는 거잖아요.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아요.”
박 씨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도장을 쥔 손이 떨렸습니다. 매수인은 정리가 되면 다시 연락하겠다며 일어섰고, 계약은 그 자리에서 미뤄졌습니다.
모두 돌아간 뒤, 중개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사장님, 이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그 댁, 옆 신도시에 아파트가 두 채 있어요. 한 채는 작년에 제가 전세를 놔 드렸고요.”
그날 저녁 시장에서 장을 보던 아내는 이웃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습니다. 박 씨가 집 판 돈에 눈이 멀어 애 둘 딸린 집을 길바닥에 내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밤 박 씨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그래도 12년 정이 있는데.” 박 씨는 천장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정은 12년 동안 다 줬소. 이제는 셈을 할 차례요.”
다음 날 박 씨는 무료 법률 상담 창구를 찾았습니다. 상담원은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갱신요구권을 이미 쓰셨다면 계약 기간이 끝날 때 보증금을 돌려주고 집을 비워 달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비나 위로금을 줘야 할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다만 의사는 꼭 문서로 남겨 두세요.”
박 씨는 직접 내용증명을 보냈습니다. 만료일에 보증금 전액을 돌려주겠으니 집을 비워 달라는 것, 위로금은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줄을 더 적었습니다. ‘아파트 두 채를 가진 분이 갈 데가 없다는 말은 거두어 주십시오.’
만료일 아침, 이삿짐 트럭은 신도시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그 뒤로 시장의 수군거림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습니다. 열쇠를 반납하러 온 최 씨는 눈을 피했습니다. 박 씨는 보증금 봉투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새 집에서는 이웃한테 잘하고 사시오.”
다시 계약 날짜를 잡던 밤, 박 씨는 공구함 맨 아래 칸을 열었습니다. 고무줄로 묶은 쪽지 뭉치가 있었습니다. 반지하에 혼자 사는 스물아홉 살 정 씨 청년이 4년 동안 월세 봉투에 넣어 온 쪽지였습니다. ‘사장님, 이번 달도 따뜻하게 잘 지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흔여덟 장 모두 같은 글씨였습니다.
청년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견습 일을 했습니다. 박 씨가 가끔 엔진 소리 듣는 법을 가르쳐 주면 수첩에 받아 적었습니다. 쪽지를 한 장씩 넘기던 박 씨는 새 계약서 특약란에 직접 한 줄을 적었습니다. ‘반지하 세입자 계약은 현재 조건 그대로 승계하며, 다음 갱신 때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
세입자의 계약은 법으로도 새 주인에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박 씨는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는 약속까지 남기고 싶었습니다. 쪽지 이야기를 들은 매수인이 웃었습니다. “이런 세입자면 제가 복을 받는 거네요.” 박 씨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습니다.
인심은 아끼지 않을수록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정으로 깎아 준 돈일수록 기록을 남기고, 약속은 문서로 받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이 상처가 되었을 때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을 거두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인심 한 줌을 남겨 두세요. 그 한 줌이 떠나는 사람의 마음까지 가볍게 해 줍니다.
십일월 첫 주, 박 씨 부부가 이사하던 날 아침 골목에는 은행잎이 노랗게 깔려 있었습니다. 청년은 출근을 미루고 트럭 짐칸의 밧줄을 단단히 묶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박 씨 손에 쪽지 한 장을 쥐여 주었습니다. 트럭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박 씨는 그 쪽지를 펴 보지 않고 웃옷 안주머니에 넣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