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16:14

“치매 아버지 집에서 모셨는데..” 1주기 날 남동생이 꺼낸 계산기에 결단했다

부모가 아프면 형제들은 저마다 사정을 말합니다. 멀어서, 바빠서, 형편이 어려워서라고 합니다. 그 사정들이 다 지나간 자리에는 대개 한 사람만 남고, 그 사람이 보낸 시간은 좀처럼 숫자로 남지 않습니다.

남쪽 바닷가 공업 도시에 사는 강 씨는 올해 쉰일곱입니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29년째 일하고 있고, 지금은 프레스 라인 생산반장입니다.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재작년에 시집을 갔습니다. 강 씨 아래로는 수도권에 사는 남동생과 내륙 도시에 사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조선소 용접공으로 살았습니다. 강 씨가 여덟 살 때 열이 올라 경기를 하자, 아버지는 작업복 차림 그대로 아들을 업고 시내 병원까지 뛰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붙던 해에는 월급을 털어 중고 자전거를 사 왔습니다. 말은 없어도 자식 일이라면 몸부터 먼저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혼자 지내던 아버지가 이상해진 것은 여든을 앞둔 해였습니다. 늘 다니던 시장 길에서 집을 찾지 못해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고, 가스 불에 올려 둔 냄비가 까맣게 타 버린 날도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매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모인 자리에서 남동생은 “형, 요양원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까지는 집에서 모시자. 우리가 들어가 살게.” 아내가 먼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부부는 살던 아파트의 전세를 빼고 아버지의 낡은 2층 단독주택으로 짐을 옮겼습니다.

그 7년은 길었습니다. 강 씨는 새벽 여섯 시에 출근했고, 낮에는 아내가 아버지 곁을 지켰습니다. 아버지는 밤이면 대문을 열고 나가려 했고, 강 씨는 현관 앞에 이불을 깔고 잤습니다. 기저귀는 한 달에 두 박스씩 들었고, 약값과 병원비는 부부의 월급에서 나갔습니다. 아내는 허리 디스크가 도졌지만 파스를 붙이고 버텼습니다. 아버지가 며느리를 “어머니” 하고 부르며 우는 밤도 있었습니다.

동생들은 명절에나 얼굴을 보였습니다.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형, 고생 많아” 한마디를 남기고 일어섰습니다. 7년 동안 병원 진료에 한 번도 따라온 적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폐렴으로 열흘을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 씨가 남동생에게 하루만 와 달라고 전화하자, 남동생은 “형, 나 이번 주 지방 출장이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강 씨는 서운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다들 사는 게 바쁘겠거니 했습니다.

아버지는 지난가을, 그 집 안방에서 강 씨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든여섯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1주기 날, 세 남매는 납골당에 다녀와 근처 갈비탕집에 모였습니다. 늦가을 찬비가 유리창을 두드렸고, 식탁에는 김이 오르는 뚝배기가 놓였습니다. 아내는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곶감을 한 봉지 챙겨 와 식탁 한쪽에 올려 두었습니다. 수저를 들기도 전에 남동생이 말을 꺼냈습니다.

“형, 이제 아버지 집 정리해야지. 동네 부동산에 물어보니까 3억은 받겠대.”

강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휴대폰을 꺼내 계산기 화면을 열었습니다.

“근데 형은 7년 동안 거기서 월세 없이 살았잖아. 그 동네 방 두 칸이면 월 50은 하거든. 50 곱하기 84개월이면 4200이야. 이건 형이 먼저 받은 셈이니까 빼고 셋이 나누자.”

여동생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오빠, 그게 공평하긴 하지. 우리는 집세 내면서 살았으니까.”

강 씨는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식탁 아래에서 아내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머릿속으로 기저귀 박스와 약봉지, 현관 앞에 깔았던 이불이 차례로 스쳐 갔습니다.

“너희들, 아버지 병원 몇 번 따라왔냐.”

남동생은 계산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형이 좋아서 모신 거잖아. 대신 형은 집세가 굳었고.”

그 말을 듣고 강 씨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갈비탕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 갔습니다. 밥값은 강 씨가 냈습니다. 식당을 나서며 그는 아내에게 우산을 받쳐 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엔 나도 계산 좀 해야겠소.”

다음 주 강 씨는 휴가를 내고 법률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상담을 맡은 변호사 윤 씨가 사정을 듣고 말했습니다. “자녀가 오랜 기간 부모를 직접 모시고 비용까지 부담했다면 기여분을 주장해 볼 수 있습니다. 형제끼리 합의가 안 되면 가정법원에서 정하게 됩니다. 다만 그 집에서 사신 부분도 따져 볼 수 있으니, 모신 기록을 꼼꼼히 남겨 두셔야 합니다.”

부부는 그날부터 7년을 다시 꺼냈습니다. 진료 기록과 약제비 영수증, 카드로 산 기저귀 내역, 아버지의 장기요양 등급 서류를 모았습니다. 아내가 달력 귀퉁이마다 적어 둔 아버지의 하루까지 보태니 상자 두 개가 가득 찼습니다.

동생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형이 형제끼리 법을 들고 나와?” 강 씨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계산은 너희가 먼저 꺼냈다.”

합의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몇 달에 걸친 가정법원 조정 끝에 부부가 아버지를 모신 기여분이 인정되었습니다. 강 씨는 정해진 몫만 받았습니다. 더 달라고 하지도, 덜 받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올봄에 팔렸습니다. 빈집을 정리하던 날, 강 씨는 안방 벽에 아버지가 연필로 그어 둔 삼 남매의 키 눈금을 오래 쓰다듬었습니다.

잔금이 들어온 날 밤, 강 씨는 형제 단톡방에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일은 이걸로 다 끝났다. 각자 건강하게 살아라.] 그리고 그 방을 나왔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후회 안 하겠어요?” 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 모신 건 하나도 후회 안 하오. 그 시간을 값으로 매기는 사람들하고 형제 노릇 하는 게 더는 힘들 뿐이오.”

부모를 모신 시간은 계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시간을 숫자로 깎으려 든다면, 지켜 온 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명하게 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기만 하는 것이 맏이의 도리는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인연을 끊어 내는 일이 아프더라도, 곁에서 함께 고생한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더 오래 남습니다.

강 씨 부부는 지금 바다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에 삽니다. 퇴근하고 나면 두 사람은 방파제 끝까지 함께 걷습니다. 초겨울 바닷바람이 차가워지면 강 씨는 아내의 목도리를 고쳐 매 줍니다. 멀리 조선소 크레인 너머로 해가 지면, 두 사람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붉은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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