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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프면 형제 가운데 누군가는 곁을 지키게 됩니다. 대개는 가까이 사는 자식, 마음이 약한 자식이 그 몫을 떠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산을 나눌 때가 되면 그동안의 수고는 셈에 들지 않아 서운함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기도 변두리 도시에 사는 장 씨는 올해 쉰여덟입니다. 시장 골목 끝에서 18년째 반찬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가게 불을 켜고 콩나물을 데치고 멸치를 볶습니다. 남편은 화물차를 몰다가 지금은 가게 배달을 돕고, 하나뿐인 딸은 출가해 아이 둘을 키웁니다.
장 씨는 삼 남매의 둘째입니다. 언니는 남편 일 때문에 일찍부터 경상도에서 살았고, 막내 남동생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닙니다. 친정어머니는 장 씨 가게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낡은 단독주택에서 혼자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손이 큰 분이었습니다. 장 씨가 처음 반찬가게를 열던 해, 어머니는 매일 아침 가게에 나와 쪽파를 다듬었습니다. “반찬은 손이 가는 만큼 맛이 나는 거여.” 장 씨는 그 말을 들으며 장사를 배웠습니다. 막내가 대학에 붙던 해에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금가락지를 팔아 등록금을 보탰습니다. 장 씨는 그 일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7년 전 봄, 어머니가 가스 불을 켜 둔 채 집을 나섰다가 골목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치매 초기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이 장 씨 집에 모였습니다. 언니는 “내가 멀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막내는 “누나, 요양원은 아직 아니지 않아?” 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장 씨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모실게. 낮에는 요양보호사 쓰고, 저녁엔 내가 가면 돼.” 장기요양 등급이 나와 방문요양은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어머니 곁을 지켜 줄 사람을 따로 쓰려니 매달 150만 원이 더 들었습니다. 장 씨는 딸 결혼 자금으로 붓던 적금을 깼고, 그 뒤로는 가게 수입에서 다달이 떼어 냈습니다. 남편은 “장모님 일인데 아까울 게 뭐 있나” 하며 말없이 배달을 한 탕 더 뛰었습니다.
요양보호사 윤 씨가 낮 동안 어머니를 돌봤고, 장 씨는 가게를 닫으면 곧장 친정으로 갔습니다. 저녁을 차려 드리고 약을 챙긴 뒤, 잠들기 전에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어머니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평생 시장 바닥을 걸어 다닌 어머니의 발에는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친정집 재산세 고지서가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 알아보니 집이 이미 막내 앞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장 씨는 대야를 든 채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엄마, 집을 왜 막내한테 줬어?” 어머니는 대답 대신 장 씨의 손등만 쓰다듬었습니다.
언니는 전화로 “아들이라고 끝까지 저러신다”며 혀를 찼습니다. 막내는 명절에나 얼굴을 비쳤고, 집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장 씨는 서운했지만 어머니를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 씻기는 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못 알아보고 “아줌마는 누구요?” 하던 날에도 그랬습니다.
올여름 끝자락, 어머니는 장 씨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여든여섯이었습니다. 7년 동안 장 씨가 낸 간병비는 1억 원을 훌쩍 넘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두 달 뒤, 남은 재산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앞으로는 시골의 작은 밭과 예금 얼마가 남아 있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시월의 오후, 삼 남매는 시청 근처 법무사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장 씨는 가게 문에 ‘오후 휴무’라고 써 붙이고 나왔습니다.
법무사가 상속 서류를 펼치자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집은 막내가 받았으니까 밭이랑 예금은 둘째한테 몰아주자. 그게 맞아.” 장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됐어. 셋이 똑같이 나눠. 엄마 모신 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그때 막내가 가방에서 투명한 서류 파일을 꺼냈습니다. 안에는 친정집 등기권리증과 도장이 찍힌 서류 몇 장, 그리고 손때 묻은 수첩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누나, 이거 받아. 그 집 누나 앞으로 넘기는 증여 서류야. 5년 전에 이미 써 놨어. 세금 문제도 법무사님이랑 다 상의해 뒀고.”
장 씨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막내가 목이 메어 말을 이었습니다. “엄마가 정신 맑을 때 나를 불러서 그러셨어. 둘째가 돈 보고 나 모셨다는 소리 들으면 안 된다고. 일단 네 이름으로 해 뒀다가 나 가고 나면 누나한테 돌려주라고. 누나한테는 절대 미리 말하지 말라고.”
언니가 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법무사도 말없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막내는 수첩을 누나 앞으로 밀었습니다. “이것도 엄마가 나한테 맡긴 거야. 누나 읽으라고.”
장 씨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펼쳤습니다. 첫 장에 어머니의 반듯한 글씨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딸이 내 발을 씻겼다. 물이 따뜻했다.] 다음 장에도, 그다음 장에도 같은 문장이 날짜와 함께 이어졌습니다. 해가 갈수록 글씨는 삐뚤어지고 커졌습니다. 날짜가 빠진 날도 있었지만 그 한 줄만은 빠짐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딸을 못 알아보던 무렵의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누가 내 발을 씻겼다. 우리 딸 손 같았다.] 마지막 장의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딸 고맙다.]
장 씨는 수첩을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7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막내가 누나의 등을 쓸었습니다. “누나, 미안해. 엄마랑 한 약속이라 말 못 했어. 명절마다 누나 얼굴 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한참 뒤 장 씨는 눈물을 닦고 말했습니다. “집은 엄마 뜻이니까 받을게. 대신 밭이랑 예금은 언니랑 너랑 나눠. 그리고 그 집은 안 팔 거야. 명절엔 다들 거기로 와.” 언니와 막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오랜 간병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형제 사이에도 금을 냅니다. 하지만 말을 잃어 가는 부모도 누가 곁을 지켰는지는 끝까지 기억합니다. 그 마음은 때로 서류 한 장보다 수첩 한 줄에 더 깊이 남습니다.
부모를 모시면서 셈을 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 때는 섣불리 단정하기보다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가족 사이의 오해는 대개 말하지 못한 사정에서 시작되고, 그 사정은 언젠가 진심이 되어 돌아옵니다.
지난 주말 장 씨는 남편과 함께 친정집 마당을 쓸었습니다. 어머니가 심어 둔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담장 밑에는 노란 국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장 씨는 툇마루에 앉아 감 하나를 깎아 남편에게 건넸습니다. 마루 끝에는 어머니의 발을 씻기던 대야가 가을 햇볕을 받으며 놓여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