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07:34

“친구 남편 장례비 400만원 대줬는데..” 10년 뒤 퇴원 날 간호사가 건넨 반찬통에 울었다

오랜 친구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어려울 때 조용히 손을 보태고도 생색 한 번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소식을 끊고 멀어지면 서운함도 말하지 못한 만큼 깊어집니다.

경상도의 한 바닷가 도시에 사는 윤 씨는 올해 예순둘입니다. 서른두 해 동안 시내버스를 몰다가 2년 전 정년을 맞아 운전대를 내려놓았습니다. 새벽 다섯 시 첫차를 몰려고 네 시에 일어나던 버릇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아내와 둘이 살고, 출가한 아들과 딸은 명절마다 손주들을 데리고 내려옵니다.

윤 씨에게는 산골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 정 씨가 있었습니다. 한 반이 열다섯 명뿐인 분교에서 6년을 짝으로 지낸 사이였습니다. 윤 씨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정 씨는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윤 씨 책상 서랍에 양은 도시락을 넣어 두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많이 담갔다 카더라. 니 먹어라.” 도시락에는 고들빼기 장아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짭조름한 맛을 윤 씨는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된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 씨는 고향 선배와 결혼해 작은 철물점을 꾸렸고, 윤 씨는 정 씨 남편과 형님 아우 하며 지냈습니다. 정 씨는 장 보러 갈 때면 일부러 윤 씨가 모는 버스를 기다렸다 탔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기사 양반, 살살 좀 모소” 하고 놀리면 승객들까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윤 씨도 정 씨네 아이들 돌잔치며 철물점 개업식까지 빠짐없이 봉투를 챙겼습니다.

10년 전 봄, 정 씨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년 가까이 투병하는 사이 철물점은 이미 문을 닫았고 병원비로 진 빚도 적지 않았습니다. 발인 전날 밤, 장례식장 사무실 앞에서 정 씨가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윤 씨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의금 들어오는 대로 맞출게요. 며칠만 기다려 주이소.”

그날 밤 윤 씨는 아내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보, 정 씨네 장례비가 한참 모자라는 모양이오.” 아내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신 퇴직하면 쓰려고 붓던 적금 있잖아요. 그거 깨요. 대신 그 사람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소.”

이튿날 윤 씨는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적금을 깼습니다. 그 돈 400만 원을 장례식장 사무실에 내며 직원에게 당부했습니다. “누가 냈는지는 절대 말하지 마이소. 고인 친구들이 모아 낸 걸로 해 주소.”

그 뒤로 정 씨는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더니 몇 해 뒤에는 살던 셋집에서도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동창회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형편 좀 풀리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안 보는 갑다” 하고 수군거리면 윤 씨는 정 씨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장아찌 도시락을 건네던 친구가 남이 된 것이 서운했습니다.

올여름 윤 씨는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다리가 저리고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고, 재활까지 6주를 병원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입원 둘째 주 월요일, 침대 옆 탁자에 작은 반찬통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간이 슴슴한 멸치볶음과 부드럽게 무친 나물이었습니다. 아내가 가져온 것도, 자식들이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간호사에게 물어도 아침 배식 때 같이 올라왔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반찬통은 그 뒤로도 매주 월요일마다 놓여 있었습니다. 메추리알 장조림, 애호박 볶음, 들기름에 볶은 무나물이 차례로 올라왔습니다. 하나같이 수술한 사람이 먹기 좋게 간을 줄인 반찬이었고, 이름이나 쪽지는 없었습니다. 아내는 병원 인심이 좋다며 웃었지만, 윤 씨는 그 손맛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퇴원하는 날은 초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아내가 짐을 싸는 동안 윤 씨는 보행 보조기를 짚고 창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담당 간호사가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어르신, 조리실 그분이 오늘 이건 꼭 전해 달래요. 그동안 반찬도 그분이 보내신 거예요.”

보자기를 풀자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이 나왔습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윤 씨는 숨을 멈췄습니다. 거무스름하게 익은 고들빼기 장아찌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장아찌 밑 바닥에는 비닐로 꼼꼼히 싼 누런 봉투와 편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친구야, 나다. 그때 장례식장 사무실 아가씨는 끝내 말을 안 해 주더라. 그래도 사무실을 나가는 니 뒷모습을 내가 봤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빚쟁이 신세로는 니 얼굴을 못 보겠더라. 그래서 이 병원 조리실에 들어왔다. 8년 만에 그이 병원비 빚 다 갚았다. 빚 갚는 동안에도 한 달에 3만 원, 넉넉한 달은 5만 원씩 따로 떼어 모았다. 10년 걸려 이제 400만 원 됐다. 배식표에서 니 이름 보고 손이 떨리더라. 동창회 못 나가서 미안하다.]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와 오만 원짜리가 뒤섞여 고무줄에 묶여 있었습니다. 윤 씨는 보조기를 짚고 그대로 병실을 나섰고, 아내가 그 팔을 부축했습니다.

지하 조리실 앞에 하얀 위생모를 쓴 정 씨가 고무장갑을 낀 채 서 있었습니다. 10년 사이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이게 다 뭐꼬. 내가 언제 갚으라 캤나.”

정 씨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니 아부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싸 준 도시락, 니가 그거 갚는다고 그런 거 다 안다. 근데 나는 숨어서 살았다 아이가. 이거라도 받아 줘야 내가 니 얼굴을 볼 수 있다.”

윤 씨는 한참 대답하지 못하다가 봉투를 품에 넣었습니다. “그래, 받으꾸마. 대신 올겨울 동창회는 니도 같이 가는 기다. 내 버스 맨 앞자리 앉던 그때처럼.”

정 씨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습니다. 윤 씨의 아내가 다가가 정 씨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친구에게 건넨 돈을 못 받을까 하는 걱정보다, 그 돈 때문에 친구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아픕니다. 그러나 소식을 끊은 사람이 꼭 마음까지 끊은 것은 아닙니다. 염치를 아는 사람일수록 빈손으로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멀리서 갚을 날만 기다립니다.

연락이 뜸해졌다고 서둘러 마음을 닫지 마세요. 오래 쌓은 정은 생각보다 질기고, 언젠가 그 사람다운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지난달 말, 윤 씨 부부와 정 씨는 고향 마을의 문 닫은 분교를 함께 찾았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늙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낮은 산자락 너머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았습니다. 세 사람은 녹슨 철봉 옆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내가 싸 온 김밥과 정 씨가 담근 장아찌를 나눠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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