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07:26

“며느리에게 생활비 100만원 줬는데..” 3년 뒤 며느리가 읽은 편지에 손이 떨렸다

자식 집안이 어려울 때 부모가 몰래 손을 보태는 일은 흔합니다. 자식의 체면을 지켜 주려고 이름을 숨기고, 고맙다는 말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침묵은 더 이상 지켜 낼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서울 변두리 동네에 사는 권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스물넷에 시내버스 회사 정비고에 들어가 서른여섯 해 동안 버스 밑을 기어 다녔습니다. 브레이크 라이닝을 갈고 엔진오일을 빼다 보면 손톱 밑의 기름때는 주말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아들 내외는 차로 이십 분 거리에서 초등학생 손자 둘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며느리는 처음부터 살가운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이듬해 겨울,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갈라진 손등을 보더니 손수 뜬 털장갑을 내밀었습니다. “아버님, 정비고 바닥이 그렇게 차다면서요. 이거 끼고 일하세요.” 권 씨는 기름이 묻을까 아까워 그 장갑을 출퇴근길에만 꼈습니다.

아내가 병원에서 마지막 석 달을 보낼 때도 며느리는 퇴근하면 곧장 병실로 왔습니다. 시어머니의 머리를 감겨 드리고, 권 씨에게는 김밥 한 줄을 쥐여 주고 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사흘 밤을 꼬박 새운 것도 며느리였습니다. 권 씨는 그때 ‘딸이 없어도 서운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년 전 봄, 아들이 다니던 인쇄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열네 해를 다닌 직장이었습니다. 마흔을 넘긴 아들을 불러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며느리의 월급 하나로 네 식구가 살아야 했습니다.

권 씨는 아들에게 돈 이야기를 꺼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아버지 연금으로 사시는 거 뻔히 아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받아요. 그 얘기 다시 하지 마세요.” 아들의 목소리는 떨렸고, 권 씨는 더 말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권 씨는 며느리를 집 앞 국밥집으로 따로 불렀습니다. “얘야, 네 통장 번호 하나 적어 다오. 매달 25일에 백만 원씩 넣으마. 애비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그놈 자존심 다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며느리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아버님, 이러시면 제가 어떻게 해요.” 권 씨는 국밥 그릇을 며느리 앞으로 밀어 주었습니다. “손주들 학원 끊기는 것보다는 낫다. 받아라.”

돈은 퇴직금 일부를 넣어 둔 정기예금을 깨서 마련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습니다. 권 씨는 정비고 후배였던 박 씨가 하는 동네 카센터에 일주일에 사흘씩 나가 타이어를 갈고 오일을 교환했습니다. 리프트 밑에 들어가면 허리가 끊어질 듯했지만, 25일이 다가오면 이상하게 힘이 났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서른여섯 번, 모두 3,600만 원이었습니다. 아들은 그사이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물류센터 야간 일과 대리운전을 오갔습니다. 며느리의 연락은 조금씩 뜸해졌습니다. 권 씨는 ‘사는 게 바쁘니 그렇겠지’ 하고 넘겼습니다.

지난겨울 아들과 소주를 한잔하던 날, 아들이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장모님한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있어요.” 권 씨는 사돈댁에서도 조금씩 도와주나 보다 싶어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된 것은 올가을이었습니다.

시월 초, 며느리의 친정어머니가 회갑을 맞았습니다. 잔치는 시내 한정식집 별실에서 열렸습니다. 아침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권 씨는 아껴 둔 회색 양복을 꺼내 입고, 흰 봉투에 오십만 원을 넣어 안주머니에 챙겼습니다.

별실 안에는 친정 쪽 친척 스무 명 남짓이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떡과 과일이 높이 쌓인 상 앞에 사돈 부인이 연분홍 한복을 입고 앉았습니다. 사회는 며느리의 사촌 동생이 맡았습니다. 케이크 촛불을 끄고 나자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큰딸이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가 있겠습니다.”

며느리가 편지지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첫 줄을 읽기도 전에 목이 메었습니다. 권 씨는 그 모습을 보며 저 아이가 친정엄마에게도 저렇게 살가운 딸이구나 싶어 흐뭇했습니다.

“엄마, 3년 전 그이가 회사를 잃었을 때 나는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매달 25일마다 백만 원씩 보내 줬지요. 그 돈 덕분에 우리 네 식구가 3년을 버텼어요. 엄마도 넉넉하지 않은 거 아는데…. 엄마, 정말 고마워요.”

별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친척 하나가 “역시 친정엄마밖에 없다”며 박수를 쳤습니다.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모의 두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장모님, 그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권 씨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손이 떨려 잔 받침이 달그락 소리를 냈습니다. 매달 25일, 백만 원, 3년. 카센터 리프트 밑에서 허리를 두드려 가며 맞춰 온 숫자가 고스란히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읽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돈 부인은 사위에게 손을 잡힌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딸과 권 씨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잔치가 끝나 갈 무렵, 권 씨가 복도로 나오자 사돈 부인이 따라 나왔습니다. 사돈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권 씨를 불렀습니다.

“사돈어른,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는 그런 돈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한 푼도요. 저도 남편 없이 식당 일 해서 사는 처지라 그럴 형편이 못 돼요. 혹시 사돈어른이 도와주신 건가요?”

권 씨는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사부인, 오늘 일은 모르시는 걸로 해 주십시오. 회갑 축하드립니다.” 권 씨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사돈 부인의 손에 쥐여 주고 비 내리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권 씨는 장모에게 갚을 빚이 있다던 아들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보낸 돈을 남편에게 친정에서 온 돈이라고 말해 온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끝내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아들 앞에서 아버지를 지우고 3년을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권 씨는 은행에 가서 매달 25일 빠져나가던 자동이체를 해지했습니다. 창구 직원이 사유를 묻자 권 씨는 “할 만큼 했습니다” 하고만 대답했습니다.

25일이 지나고 며느리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아버님, 이번 달은 무슨 일 있으세요?” 권 씨는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다 휴대전화를 덮었습니다. 답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는 짧게 전화만 했습니다. “애비야, 이제 이 아비 걱정은 말고 네 식구는 네 힘으로 챙겨라. 손주들은 네가 데리고 와라.” 권 씨는 진실을 끝내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손주들이 사는 집까지 흔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 며느리는 시댁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권 씨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장롱 서랍 속 털장갑은 버리지 않았지만 다시 꺼내 끼지도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일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은 미덕입니다. 하지만 이름을 숨긴 정성이 거짓의 밑천이 되었다면, 그 정성은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따져 묻고 소리치지 않아도, 조용히 손을 거두는 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베푸는 쪽이 끝을 정하는 것은 박정한 일이 아닙니다.

늦가을 어느 오후, 권 씨는 카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하천변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둑길을 따라 은행잎이 노랗게 깔려 있었고, 얕은 물가에는 왜가리 한 마리가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권 씨는 벤치에 앉아 아들이 보내온 손주들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았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 무렵, 권 씨는 기름때 밴 손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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