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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이라면 따지고 받을 일도 피를 나눈 사이라 그냥 덮고 넘어가곤 합니다. 그렇게 덮어 둔 마음이 세월이 흐른 뒤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는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경상도 바닷가 도시에 사는 권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어시장 뒤편 골목에서 30년 동안 떡집을 하다가 두 해 전에 가게를 접었습니다. 선박 수리소에서 일하다 은퇴한 남편과 단둘이 살고, 아들과 딸은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렸습니다. 권 씨는 삼 남매 중 둘째 딸이고, 아래로 아홉 살 어린 막내 남동생이 있습니다.
권 씨에게 막내는 동생이라기보다 자식에 가까웠습니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면 동생을 등에 업고 학교에 갔고, 수업 시간에 동생이 울면 복도에 나가 달랬습니다. 열아홉에 도시로 나와 방직공장에 다닐 때는 첫 월급을 털어 동생의 운동화와 책가방을 사서 부쳤습니다. 떡집을 연 뒤에는 고등학생이 된 동생이 방학마다 내려와 새벽 다섯 시에 팥을 저었습니다. 솥 앞에서 졸던 동생이 팥물에 손을 데었을 때, 권 씨는 동생 손을 찬물에 담그고 같이 울었습니다.
동생은 성실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건설 현장을 전전하다 차린 작은 식당은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빚을 정리하고 나니 아내와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단칸 월세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8년 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것은 산골 마을의 오래된 시골집 한 채와 논 몇 마지기였습니다. 논은 큰언니 몫으로 정리되었고, 시세로 8000만원쯤 되는 집은 권 씨와 동생이 반씩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십구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권 씨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집은 니 앞으로 다 해라. 나는 내 몫 안 받을란다.”
“누나, 그건 아니다. 누나도 자식들 있는데.”
“우리 애들은 다 컸다. 니 딸은 이제 고등학생이다. 애 키울 집이 있어야지.”
동생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한참 말이 없었습니다. 권 씨는 상속재산 분할 협의서에 도장을 찍어 집을 동생 명의로 몰아주었고, 등기 비용과 새는 지붕을 손볼 300만원은 떡집 매상에서 떼어 붓던 적금을 깨서 보탰습니다. 남편은 서운한 기색 없이 한마디만 했습니다. “당신 동생인데, 당신 마음대로 하소.”
세월은 빨랐습니다. 동생 식구는 그 집으로 들어가 읍내 농협 창고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갈수록 말수가 줄었습니다. 명절에도 잠깐 얼굴만 비치고 서둘러 돌아갔고, 전화는 늘 먼저 끊었습니다. 재작년에는 고향 이웃 최 씨에게서 묘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동생이 읍내 부동산에 그 집 시세를 묻고 다니더라.”
권 씨는 애써 웃어넘겼지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냄새가 밴 집을 팔려는 걸까, 나한테 미안해서 피하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전화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올해 시월, 가을비가 사흘째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우체부가 두툼한 등기 우편 하나를 건네고 갔습니다. 보낸 사람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젖은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고 열자, 꽃무늬가 찍힌 청첩장이 먼저 나왔습니다. 조카가 다음 달에 혼인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첩장 아래에 서류 몇 장이 접혀 있었습니다. 등기권리증 사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 주소 아래 소유자 칸에 동생과 함께 권 씨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지분은 각각 2분의 1이었습니다. 그 뒤로 누런 편지지 한 장이 끼어 있었습니다.
[작은누나, 그동안 연락 자주 못 해서 미안했어요. 집을 손볼 때마다 누나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다 고치고 나서 보여 주고 싶어서 참았어요. 누나가 양보한 집에서 우리 애가 컸어요. 이제 반은 누나 집입니다.]
권 씨는 의자를 붙잡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거실에 있던 남편이 놀라 달려왔고, 권 씨는 서류를 내밀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한참 뒤에야 떨리는 손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니 이게 뭐꼬. 내가 언제 돌려 달라 했나.”
“누나, 그 집 받던 날부터 정했다. 애 시집갈 때까지 내 손으로 다 고쳐 놓고, 누나 몫은 돌려주겠다고.”
동생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처음 몇 해는 쉬는 날마다 혼자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갈았고, 그다음에는 무너진 담장을 쌓고 부엌을 새로 들였습니다. 낡은 보일러를 바꾸고 화장실을 집 안으로 들이는 데 꼬박 8년이 걸렸습니다. 부동산에 시세를 물었던 것도 팔려는 게 아니라, 누나 몫을 얼마로 쳐야 할지 알아보려던 것이었습니다. 형제 사이라도 지분을 넘기면 증여가 되니, 법무사 사무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며 세금과 등기 비용을 알아보고 모아 둔 돈으로 치렀다고 했습니다.
“누나한테 전화하면 다 말해 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짧게 끊었다. 서운했제?”
“이 미련한 놈아. 그 돈으로 니 딸 혼수나 하지.”
“혼수는 애가 알아서 한단다. 아빠는 고모한테 갚을 거 먼저 갚으라 카더라.”
전화기 너머로 동생도 울고 있었습니다. 권 씨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동생의 짧은 대답과 서둘러 떠나던 뒷모습은 무심함이 아니라, 다 갚기 전에는 누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다는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을요.
주는 사람은 준 것을 잊으려 하고,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평생 품고 삽니다. 말이 줄었다고 마음까지 식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빚은 말 대신 세월과 땀으로 갚아지기도 합니다.
서운함이 들 때 섣불리 판단하기보다 조금 더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피를 나눈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믿음일지 모릅니다.
조카의 혼례를 사흘 앞둔 늦가을, 권 씨는 남편과 함께 시골집을 찾았습니다. 새로 칠한 대문 너머로 반듯해진 기와지붕이 보였고, 마당 대추나무 아래에는 동생이 직접 짠 평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남매는 그 평상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한 잔씩 따랐습니다. 산 너머로 해가 지자, 굴뚝에서 흰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