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3 15:26

“시어머니 대소변 받아 냈는데..” 1년 뒤 시누이가 내민 누런 봉투에 펑펑 울었다

부모를 모신 자식과 멀리서 안부만 묻던 자식은 같은 부모를 두고도 전혀 다른 시간을 삽니다. 그래서 부모가 떠난 뒤 유산을 나누는 자리는 남은 물건보다 서운함을 먼저 꺼내 놓는 자리가 되곤 합니다.

경상도 내륙의 작은 읍내에 사는 박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스물넷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평생 살림만 했습니다. 남편은 읍내 농협에서 30년을 일하고 퇴직했고, 아들과 딸은 모두 대구에서 직장을 다닙니다. 시댁 형제는 남편 아래로 시누이 하나와 시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깐깐한 분이었습니다. 신혼 시절 박 씨가 된장을 짜게 담그자 장독을 통째로 엎으며 “맏며느리 손맛이 이래서야 제사를 어찌 지내노”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래도 아들을 낳던 날 밤새 미역국을 끓여 머리맡에 놓아 준 사람도 시어머니였습니다.

10년 전 시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오른쪽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동생이 먼저 말했습니다. “형님, 요양원 알아볼까요?” 박 씨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에서 모셔야 한다. 내가 하꾸마.”

그날부터 9년이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두 시간마다 몸을 돌려 욕창을 막았습니다. 밤에 대소변을 실수한 날은 이불을 손으로 빨았습니다. 허리가 상해 침을 맞으러 다니면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시누이는 서울에 살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내려와 반나절 머물다 갔습니다. 올 때마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 씨는 부엌에서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똥 기저귀는 내가 갈고 귀여움은 딸이 받는구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해 전,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박 씨를 불러 말했습니다. “아가, 면사무소 가서 니 인감 좀 떼 온나. 내 요양 서류에 필요하단다.” 박 씨는 영문도 묻지 않고 서류를 떼어 드렸습니다. 며칠 뒤 시누이가 내려와 그 봉투를 챙겨 갔습니다.

작년 가을 시어머니가 아흔하나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장롱을 정리하던 날, 박 씨는 손을 멈췄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끼던 금가락지와 비취 노리개, 진주 목걸이가 든 자개 함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시누이가 장례 전날 어머니 방에서 무언가를 가방에 넣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박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패물이 탐나서가 아니었습니다. 9년 동안 곁을 지킨 사람에게 반지 하나 남겨 주지 않은 시어머니가 서운했고, 말도 없이 다 가져간 시누이가 야속했습니다. 그 뒤로 시누이 전화가 와도 박 씨는 짧게 받고 끊었습니다.

그리고 올가을, 시어머니 첫 기일을 지낸 다음 날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읍내 집 안방에 모였습니다. 남은 것을 정리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시어머니 이름으로 된 시골집과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창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방 한쪽에는 시어머니가 쓰던 환자용 침대 자리가 아직 네모나게 바래 있었습니다.

시동생이 서류를 펼치며 말했습니다. “집은 형님이 지키시고, 통장은 셋이 나누입시더.”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시누이가 가방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내 박 씨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언니, 이거 받으세요.”

봉투 안에는 등기권리증 한 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을 뒤 산자락에 있는 밭 900평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부터 고추와 참깨를 심어 온 밭이었습니다. 소유자 칸에 박 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박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가씨, 이게 무슨…….”

시누이의 눈이 붉어졌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해 둔 거예요. 그때 언니한테 인감 떼 오라고 한 거, 요양 서류가 아니라 이거였어요. 제가 엄마 모시고 법무사 사무실 다니면서 등기하고 세금 신고까지 다 마쳤어요.”

“엄마가 그랬어요. ‘이건 큰며느리 몫이다. 내 똥 받아 낸 사람이 받아야지 누가 받노.’ 그런데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내놓으면 혹시 형제들끼리 말이 날까 봐, 한 해는 지나고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1년 동안 제가 갖고 있었어요.”

시누이는 다른 봉투도 하나 꺼냈습니다. 금가락지와 노리개, 진주 목걸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패물은 제가 맡아 두기만 한 거예요. 장례 때 사람들 드나들면 잃어버릴까 봐요. 엄마가 가락지는 언니 손에 끼워 드리라고 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시동생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형수님, 저는 아무 말 안 합니더. 그 밭은 형수님 거 맞습니더.” 남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내의 등을 쓸었습니다.

박 씨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시누이가 내려와 문을 닫고 나누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그 웃음소리 속에 자신을 향한 시어머니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요. 박 씨는 등기권리증을 가슴에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아가씨, 내가 1년 동안 아가씨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아나. 미안하다, 참말로 미안하다.”

시누이가 박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오래 기저귀를 빨아 마디가 굵어진 손이었습니다. 시누이는 그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언니, 엄마가 그랬어요. 큰며느리 손이 우리 집 기둥이라고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막내딸 코델리아는 아버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못해 쫓겨나지만, 끝까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그 딸이었습니다. 말이 적은 사람의 마음은 늘 늦게 보입니다.

부모를 떠나보낸 뒤 형제 사이에 서운함이 생기면, 혼자 짐작으로 마음의 문을 닫기 전에 한 번쯤 물어보세요. 내가 본 것은 일의 한쪽뿐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뜻이 담긴 일이라면 서류로 분명히 남기고, 형제들과 미리 터놓고 나누는 것이 남은 가족의 정을 지키는 길입니다.

올가을 박 씨는 시누이와 함께 뒷산 밭에 올랐습니다. 비가 갠 하늘 아래 들깨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고, 밭둑의 감나무에는 붉은 감이 등불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시어머니가 앉아 쉬던 밭머리 바위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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