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3 15:59

“딸네 쌍둥이 손주 키워 줬는데..” 공개수업 날 손자가 그린 가족 그림에 말문이 막혔다

맞벌이하는 자식을 대신해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가 많습니다. 돈을 받자니 자식 형편이 마음에 걸리고, 안 받자니 몸이 고됩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내 새끼 내가 보는데 무슨 돈이냐” 하며 손사래를 칩니다. 다만 그렇게 건넨 정성이 어떤 이름으로 남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윤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남쪽 바닷가 소도시의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 35년 동안 옷 수선과 재봉 일을 했습니다. 바짓단을 줄이고 교복 치마를 늘리고, 명절 앞이면 한복 저고리 고름을 밤새 달았습니다. 남편은 10년 전 바다 일을 하다 다친 허리 병으로 먼저 떠났고, 자식은 외동딸 하나뿐입니다.

딸은 수도권 신도시에서 회계 일을 하고, 사위는 건설회사에 다닙니다. 6년 전 딸이 쌍둥이 남매를 낳고 복직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린이집 대기는 길었고, 친가 쪽 사돈댁은 대구에서 가게를 하느라 올라올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딸이 전화로 울먹였습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윤 씨는 그 주에 수선집 문을 닫았습니다. 단골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30년 넘게 쓴 재봉틀 한 대만 챙겨 딸네 아파트로 올라왔습니다. 딸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엄마, 한 달에 얼마씩 드리면 될까?” 윤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됐다. 그 돈 모아서 너희 집 대출이나 갚아라. 엄마는 연금이랑 모아 둔 게 있다.”

그렇게 6년이 흘렀습니다. 쌍둥이가 밤새 열이 오르면 윤 씨는 미지근한 물수건을 갈아 대며 새벽을 지켰습니다. 유치원 발표회 날에는 재봉틀을 돌려 남매의 무대 옷을 손수 지어 입혔습니다. 다른 엄마들이 “어디서 사셨어요?” 하고 물을 만큼 고운 옷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실내화 주머니에 이름을 수놓아 주고, 매일 아침 두 아이 머리를 빗기고 교문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윤 씨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기요, 물 주세요” 하거나 그냥 옷자락을 잡아끌었습니다. 명절에 대구 사돈댁이 올라오면 아이들은 “할머니!” 하고 달려가 안겼습니다. 윤 씨가 넌지시 묻자 딸은 웃어넘겼습니다. “애들이 쑥스러워서 그래, 엄마. 신경 쓰지 마.”

윤 씨는 그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부르는 말이 무슨 대수인가, 아이들 잘 크면 그만이지 싶었습니다.

그리고 쌍둥이가 2학년이 된 올해 오월, 학교에서 공개수업이 열렸습니다. 딸과 사위는 회사 일로 오지 못했고, 윤 씨가 혼자 갔습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려 윤 씨는 우산을 접어 들고 교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섰습니다. 젊은 엄마들 사이에 선 윤 씨는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매만졌습니다.

수업은 ‘우리 가족을 소개해요’였습니다. 교실 뒤 게시판에는 아이들이 그린 가족 그림이 줄지어 붙어 있었습니다. 윤 씨는 손자의 이름표가 붙은 그림 앞에 섰습니다. 크레파스로 그린 엄마와 아빠, 쌍둥이 남매가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뽀글머리 할머니가 그려져 있고 ‘할머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대구 사돈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맨 끝,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를 든 사람이 작게 서 있었습니다. 그 아래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집 아줌마.’

윤 씨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그림 속 사람이 자신이 매일 두르는 꽃무늬 앞치마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빠졌습니다.

옆에 선 젊은 엄마가 그림을 보며 웃었습니다. “요즘은 도우미 아주머니도 가족처럼 그려 주나 봐요. 보기 좋네요.” 윤 씨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며 윤 씨는 손자의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얘야, 그림에 아줌마라고 쓴 사람은 누구니?” 손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 아니 아줌마요. 엄마가 그랬어요. 아줌마는 우리 집 일 도와주시는 분이고, 우리 할머니는 대구 할머니 한 분이라고요.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말하래요.”

그날 저녁, 윤 씨는 퇴근한 딸을 식탁에 앉혔습니다. 딸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엄마, 시어머니가 애들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 할머니는 한 분이면 된다고. 그리고 솔직히 애들 친구 엄마들이 외할머니가 시장에서 수선 일 하셨다고 하면 좀…”

딸은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윤 씨는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습니다. 35년 동안 남의 바짓단을 줄여 딸을 대학까지 보낸 그 손이, 딸에게는 감추고 싶은 손이었던 것입니다.

윤 씨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줌마 소리 들으려고 가게 문 닫은 게 아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가르쳤으면, 엄마는 이제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구나.”

그날 밤 윤 씨는 짐을 쌌습니다. 옷가지는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갔습니다. 재봉틀은 아이들 방 구석에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쪽지를 남겼습니다. ‘내일부터 아이 돌봐 줄 분은 제대로 구해서 정당하게 품삯을 드려라. 사람 손을 빌리는 일에는 값이 있는 법이다.’ 첫 기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윤 씨는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윤 씨는 시장 골목 옛 가게 자리 근처에 작은 수선 자리를 다시 얻었습니다. 옆 가게 정 씨가 반갑게 맞았습니다. “아이고, 형님 손 다시 보니 시장이 살겠네요.” 윤 씨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석 달 뒤, 딸이 쌍둥이를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손녀가 머뭇거리다 윤 씨 앞에 서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외할머니.” 그 한마디를 들으려고 6년이 걸렸습니다. 윤 씨는 아이를 안아 주었지만, 다시 올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방학 때마다 너희가 외할머니 집에 오너라. 할머니가 옷 지어 줄게.”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늙은 왕은 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준 뒤 그 딸들의 집에서 쫓겨나듯 떠돌게 됩니다. 아낌없이 주는 마음은 귀하지만, 그 마음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지켜보지 않으면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자식을 돕는 일에도 경계가 필요합니다. 돈을 받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는 분명히 해 두세요. 서운한 마음을 ‘부르는 말이 뭐 대수냐’ 하고 덮어 두지 마세요. 사랑은 말없이 건넬 수 있지만, 존중은 말로 확인받아야 합니다.

올가을 윤 씨는 수선 자리 앞에 의자를 내놓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장 지붕 너머로 갈매기가 낮게 날았고, 저녁 햇살이 항구의 고깃배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윤 씨는 바늘을 쥔 손을 잠시 내려놓고 해가 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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