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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오래 아프면 그 곁을 지키는 자식은 대개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형제들은 저마다 사정이 있다며 한발 물러서고, 남은 한 사람이 제 월급과 제 잠을 덜어 부모 곁을 지킵니다. 그리고 부모가 떠난 뒤에야 형제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입니다.
경기도 변두리 도시에 사는 신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동네 어린이집에서 15년째 조리사로 일합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출근해 아이들 마흔 명의 간식과 점심을 차립니다.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다 퇴직한 남편과 둘이 살고, 외아들은 결혼해 따로 나가 있습니다.
신 씨는 삼남매 가운데 둘째 딸입니다. 위로 큰오빠, 아래로 막내 남동생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평생 목수로 일한 아버지는 동네 끝 낡은 단층집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집안 형편 탓에 대학에 간 자식은 큰오빠뿐이었습니다. 신 씨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봉제 공장에 나가던 첫날, 아버지는 작업복 차림으로 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미안하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속이 제일 깊은 건 너다.”
마흔여섯에 신 씨가 조리사 자격증을 따자 아버지는 은행나무를 깎아 도마 하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뒷면에는 서툰 글씨로 ‘우리 둘째 밥상’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 씨는 지금도 그 도마를 씁니다.
7년 전 봄,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삼남매가 아버지 집 마루에 둘러앉았습니다. 큰오빠가 먼저 말했습니다. “나는 직장이 지방이라 자주 못 온다. 대신 아버지 연금 통장은 내가 맡아서 약값이랑 공과금 낼게.” 막내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누나, 나는 형편이 어려워서 돈도 시간도 없어.”
신 씨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낮 동안 아버지를 돌볼 간병인을 구하니 한 달에 150만 원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이 물었습니다. “당신 월급 거의 다 들어가겠네.” 신 씨가 답했습니다. “아버지 손에서 컸는데, 이제 갚는 거지.” 남편은 말없이 집 생활비를 자기 연금으로 돌렸습니다.
그 뒤 7년 동안 신 씨는 새벽에 아버지 집에 들러 아침을 차려 놓고 출근했고, 퇴근하면 다시 그 집으로 가 저녁을 먹이고 씻겼습니다. 간병인에게 건넨 돈만 1억 2,600만 원이었습니다. 그사이 식단표를 짜던 버릇대로 공책에 간병 일지를 적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드셨는지, 어떤 말을 하셨는지 날마다 몇 줄씩이었습니다.
큰오빠는 명절에만 얼굴을 비쳤습니다. 간병비를 조금 나누자고 하자 오빠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연금으로 약값 대기도 빠듯하다.” 막내는 전화마저 뜸했습니다.
올여름 아버지는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달 뒤 늦가을 비가 내리던 날, 삼남매는 30년 전 아버지 집 등기를 맡아 주었던 법무사 윤 씨의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상가 2층 사무실에는 작은 석유난로가 켜져 있었고, 종이컵에 담긴 보리차에서 김이 올랐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큰오빠가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집을 나한테 증여하셨어. 도장도 찍혀 있고.” 증여계약서였습니다. 막내는 창밖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 씨의 눈이 날짜에 멈췄습니다. 아버지가 진단을 받고 두 달 뒤였습니다. 신 씨는 가방에서 일지를 꺼내 그날을 찾았습니다. ‘아침에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고 누구시오, 하셨다.’
그때 윤 씨가 서랍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냈습니다. “아버님이 따로 맡기신 게 있습니다. 진단받기 한 달 전쯤 직접 오셔서 증인을 세우고 녹음으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녹음 속 아버지는 먼저 자기 이름과 그날 날짜를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요새 깜빡깜빡해서 정신 있을 때 해 둔다. 큰애는 대학 공부에 장가갈 때 전세금까지 내가 다 대 줬다. 이 집은 나를 끝까지 돌볼 둘째에게 준다.” 사무실에는 빗소리만 남았습니다.
봉투에는 서류가 더 있었습니다. “상속 정리에 재산 내역이 필요해서 따님 위임장으로 은행에서 떼 온 아버님 연금 통장 내역입니다.” 연금이 들어온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80만 원씩 같은 계좌로 빠져나가 있었습니다. 큰오빠 계좌였습니다. 7년 동안 빠진 달이 없었고, 다 합치면 6,700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 돈이면 간병비 절반은 아버지 연금으로 낼 수 있었습니다.
윤 씨가 계약서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증인란 서명이 막내아드님 것 맞습니까?” 막내의 어깨가 떨렸습니다. “형이 집 받으면 나한테 2,000만 원 떼어 준다고 했어. 그날 아버지는 도장이 뭔지도 모르셨어. 형이 손에 쥐여 드렸어.”
윤 씨가 차분히 말했습니다. “진단 뒤에 쓴 계약서라면 아버님 의사능력부터 따져야 합니다. 진료 기록과 일지, 녹음이 있으니 다투시면 법원이 가릴 겁니다. 녹음 유언도 법원 검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큰오빠는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접었습니다.
신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 가져간 돈 내놓으라는 말은 안 할게. 그 돈이 약값이 아니었다는 걸 오빠가 알면 됐어. 대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술 한 잔은 올리고 와.” 그러고는 울고 있는 막내를 보았습니다. “다음엔 도장 말고 손을 보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곁을 지킨 자식의 수고는 부모가 가장 먼저 압니다. 말로 하지 못해도 부모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마음을 기억해 둡니다.
부모의 통장을 맡았다면 내역을 형제들과 나누고, 간병한 날들은 짧게라도 기록해 두세요. 부모의 뜻은 정신이 맑을 때 정식 절차를 갖춰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형제 사이를 지키는 길입니다.
이달 초 신 씨는 아버지 집 마루에 앉아 감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당에는 붉은 감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신 씨는 은행나무 도마를 꺼내 무를 썰고, 아버지가 좋아하던 뭇국을 끓였습니다. 부엌 창으로 늦가을 햇살이 들어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