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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하는 자식을 대신해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가 많습니다. 수고비를 받기는커녕 제 주머니를 털어 가며 아이를 업고 다니는 일도 흔합니다. 그 고생 끝에 바라는 것은 손주 입에서 나오는 “할머니” 한마디일지도 모릅니다.
경기도 남쪽의 한 소도시에 사는 강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마흔여덟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시내 한 은행 지점에서 12년 동안 청소 일을 했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가 객장 바닥을 닦고, 마감 뒤에는 화장실과 탕비실을 치웠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외동딸을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딸은 회계사무소에 다니다 사위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사위네는 서울에서 오래 건축자재 사업을 해 온 넉넉한 집안이었습니다. 상견례를 앞둔 날 밤, 딸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시댁 어른들 앞에서 청소 일 얘기는 안 하면 안 될까.” 강 씨는 서운했지만 웃어넘겼습니다. “그래, 너 편한 대로 해라.”
6년 전 봄,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출산휴가가 끝나 갈 무렵 딸은 밤마다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허리가 안 좋아 아이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둬야 할 것 같아.” 강 씨는 다음 날 사표를 냈습니다. 함께 일하던 윤 씨가 “정년이 코앞인데 아깝지 않으냐”고 붙잡았지만 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날부터 강 씨는 매일 아침 일곱 시 버스를 타고 딸네 아파트로 갔습니다.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고, 아이를 업은 채 빨래를 갰습니다. 아이가 열이 나는 밤이면 자기 집으로 데려와 밤새 물수건을 갈았습니다. 손녀가 처음 걸음마를 뗀 곳도, 처음 “할미”라고 부른 곳도 강 씨의 낡은 연립주택 거실이었습니다.
딸이 수고비 얘기를 꺼낸 적도 있었습니다. 강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내 손주 보는데 무슨 돈이냐. 너희 대출이나 갚아라.” 오히려 강 씨는 매달 50만 원을 딸 통장에 넣었습니다. 분유값과 기저귀값에 보태라는 돈이었습니다. 퇴직금과 남편이 남긴 보험금으로 들어 둔 적금을 헐었고, 모자라는 달은 연금으로 메웠습니다. 6년 동안 보낸 돈은 3,600만 원이었습니다.
강 씨 집 작은방에는 손녀의 낮잠 이불과 칫솔, 크레파스와 여벌 옷이 늘 놓여 있었습니다. 강 씨는 손녀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 비밀번호를 딸 생일로 바꿔 두었습니다.
서운한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돈댁이 딸네 집에 온다는 날이면 딸은 전날 저녁 “엄마, 내일은 쉬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6년 동안 강 씨는 사돈댁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강 씨는 그저 사돈 어른 앞이 어려워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올해 3월,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딸은 “시어머니는 감기 때문에 못 오신대” 하며 강 씨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강 씨는 전날 밤 새 책가방에 이름 스티커를 하나하나 붙였습니다.
입학식 날은 꽃샘바람이 매서웠습니다. 강 씨는 마스크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운동장 한쪽에 섰습니다. 노란 책가방을 멘 손녀는 줄을 서 있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식이 끝나 갈 무렵, 교문 쪽에서 사돈댁이 걸어왔습니다. 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어머님, 못 오신다더니…” 사돈댁은 “첫 손주 입학식인데 어떻게 빠지니” 하고는 강 씨를 보았습니다. 결혼식장에서 한 번 본 얼굴을, 마스크와 털모자 너머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 이분이 그 돌봄 도우미 분이시구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사돈댁은 흰 봉투 하나를 강 씨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봉투에는 ‘돌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애 엄마가 고생이 많았죠. 우리 애가 집에 오면 맨날 아줌마 얘기만 해요. 아줌마 콩나물국이 제일 맛있다고요.”
강 씨는 봉투를 든 채 굳어 버렸습니다. 그때 손녀가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며 “할머—” 하다 말고, 친할머니를 힐끔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고쳐 불렀습니다. “아줌마, 나 사진 찍어 줘.” 강 씨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딸이 강 씨의 팔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엄마, 오늘만 그냥 넘어가 줘.” 강 씨는 사돈댁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손녀 사진을 한 장 찍어 준 뒤 말없이 교문을 나섰습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봉투를 쥔 손이 계속 떨렸습니다.
그날 밤 강 씨는 작은방 불을 켜고 손녀 짐을 상자 두 개에 담았습니다. 이불 사이에서 삐뚤빼뚤한 쪽지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할머니 집이 제일 좋아요.’ 강 씨는 그 쪽지만 지갑에 넣고, 뜯지 않은 봉투는 상자 맨 위에 올렸습니다.
상자에는 메모를 붙였습니다. “봉투는 사돈께 돌려드려라. 나는 도우미가 아니라 네 엄마다. 남들 앞에서 나를 뭐라 부르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손녀 입으로 나를 아줌마라 부르게 한 건 못 참겠다.” 강 씨는 콜택시로 상자를 딸네 아파트에 보내고, 50만 원 자동이체도 해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 씨는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습니다. 6년 동안 딸 생일로 열려 있던 문이었습니다. 문이 철컥 잠기는 소리를 듣자 강 씨는 신발장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열네 통 와 있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위한 희생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손주를 키운 수고는 돈으로 따질 수 없지만, 그 수고를 한 사람의 이름까지 지워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리를 지키는 일은 자식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문을 잠그는 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다음에 열 때 제대로 열기 위해서입니다.
올봄 강 씨는 오후마다 동네 천변 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개나리가 둑을 따라 노랗게 번졌고, 버들가지에 연둣빛 물이 올랐습니다. 강 씨는 지갑 속 쪽지를 한 번 만져 보고, 해가 기울 때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