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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하는 자식을 대신해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가 많습니다. 몸은 고되고 생색 낼 일도 없지만, 손주가 따뜻한 밥 먹고 자라면 그것으로 됐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가 품을 떠나고 나면, 그 시절이 나 혼자만의 기억이 된 것 같아 문득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경상도의 한 바닷가 소도시에 사는 강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열일곱 살에 봉제 공장에서 미싱을 처음 잡았고, 서른다섯부터는 시장 골목에서 작은 수선집을 꾸려 왔습니다. 바짓단을 줄이고 지퍼를 갈아 온 세월이 어느덧 33년입니다. 남편은 어선 기관장으로 일하다 은퇴했고, 외동딸은 결혼해 같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외손자가 세 살이 되던 해, 딸이 친정에 찾아와 눈물을 쏟았습니다. 딸은 병원에서 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였고, 사위는 조선소에서 일하며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엄마, 어린이집 끝나면 애 맡길 데가 없다.” 강 씨는 딸의 등을 쓸어 주었습니다. “걱정 마라. 평일엔 내가 끼고 잘란다. 니는 일이나 해라.”
딸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하자 강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손주 밥값 받는 할매가 어디 있노.” 그날부터 강 씨는 저녁 여섯 시면 수선집 문을 닫았습니다. 밀린 일감은 손자가 잠든 뒤 안방에 재봉틀을 놓고 밤늦게까지 했습니다.
손자는 수선집 재봉틀 옆,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방석 위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장을 보고 돌아오면 손자가 먼저 물었습니다. “할머니, 오늘 반찬 뭐야?” 강 씨가 뜸을 들이다 “달걀장조림” 하고 대답하면, 손자는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손자는 당근을 싫어했습니다. 강 씨는 당근을 쌀알만 하게 다져 달걀말이 속에 숨겼고, 손자는 그것도 모르고 두 줄씩 먹어 치웠습니다.
어느 겨울에는 강 씨가 몸살로 꼼짝을 못 했습니다. 겨우 라면 하나를 끓여 놓고 강 씨는 미안해했습니다. “할매가 오늘은 반찬을 못 했다.” 다섯 살 손자는 작은 손으로 할머니 이마를 짚더니 말했습니다. “할머니, 내가 커서 밥 해 줄게.”
손자가 글을 깨칠 무렵, 강 씨는 손님들 바지 길이와 허리 치수를 적다 남은 공책 한 권을 내주었습니다. 손자는 밤마다 그 공책에 뭔가를 끄적였고, 강 씨는 그림 그리며 노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렀습니다. 손자가 아홉 살 되던 해, 딸이 낮 근무로 옮기면서 손자는 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강 씨는 손자가 덮던 이불을 한참 동안 개지 못했습니다.
중학생이 되자 손자의 발길은 뜸해졌습니다. 명절에 와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다 돌아갔고, 전화를 걸면 “응, 할머니. 잘 지내요” 한마디로 끝났습니다. “그래 끼고 키웠는데, 이제 할매는 생각도 안 나는갑다.” 강 씨가 서운한 속을 털어놓으면 남편은 “다 그럴 나이요” 하며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손자가 조리고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강 씨는 딸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가까이 지난 늦가을, 손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할머니, 졸업 앞두고 학교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손님을 직접 초대해서 한 상 차리는 시식회를 해요. 할머니가 꼭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손자가 먼저 할머니를 부른 것은 몇 년 만이었습니다.
시식회 날은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강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둔 남색 투피스를 꺼내 입고 남편과 학교로 향했습니다. 실습실에는 하얀 조리복을 입은 학생들이 분주히 오갔습니다. 창가 자리 이름표에는 손자의 글씨로 [우리 할머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키가 훌쩍 큰 손자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손자는 그릇을 하나씩 내려놓았습니다. 콩나물국, 달걀장조림, 애호박전, 땅콩 넣은 멸치볶음, 고등어 무조림, 그리고 노란 달걀말이 한 접시였습니다.
강 씨는 젓가락을 든 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모두 손자가 어릴 적 강 씨 부엌에서 먹던 반찬이었습니다. 달걀말이를 한 입 베어 물자 쌀알만 한 당근이 씹혔습니다. 손자가 쑥스럽게 웃었습니다. “할머니가 숨겨 놓은 거, 나 다 알았어요.”
손자는 가방에서 낡은 공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표지는 닳아 너덜너덜했지만, 강 씨는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겉장에 강 씨 글씨로 적힌 ‘치수 공책’ 아래, 삐뚤빼뚤한 글씨로 ‘할머니 밥 일기’라고 덧붙여 쓰여 있었습니다.
공책 안에는 서툰 글씨가 빼곡했습니다. [월요일 달걀장조림 맛있다] [화요일 애호박전 두 개 먹음] [수요일 할머니가 고등어 가시 다 발라 줌] 어느 겨울 날짜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할머니 아파서 라면. 할머니 빨리 나아라.]
공책 사이에는 반으로 접은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강 씨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펼쳤습니다. [이번엔 내가 할머니 밥 해 줄게요.]
손자가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중학교 때 엄마 아빠 늦는 날이면 혼자 편의점 도시락 먹었어요. 그때마다 이 공책 펴 봤어요. 할머니 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요. 그래서 요리사 되기로 했어요. 연락 자주 못 한 건, 제대로 차려 드릴 수 있을 때 부르고 싶어서였어요.”
곁에 있던 실습 담당 선생님이 거들었습니다. “메뉴를 정하라니까 교과서 대신 이 공책을 들고 왔어요. 할머니 맛을 내겠다고 몇 주를 연습했습니다.”
강 씨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멀어진 줄만 알았던 손자가 사실은 할머니 부엌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요. 강 씨는 쪽지를 가슴에 대고 실습실 한가운데서 펑펑 울었습니다. 무뚝뚝한 남편도 안경을 벗어 눈가를 훔쳤습니다. 강 씨는 손자가 차린 밥을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차려 준 밥은 몸만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밥상 앞에서 나눈 말과 온기는 아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언젠가 제 길을 찾는 힘이 됩니다.
자라는 아이의 연락이 뜸해지는 것은 마음이 멀어져서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서운한 마음은 잠시 접어 두고 기다려 주세요. 정성껏 차린 밥상은 반드시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첫눈이 내린 겨울 주말, 강 씨는 남편, 손자와 함께 바닷가 방파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잿빛 바다 위로 갈매기가 낮게 날았고, 멀리 등대에 하나둘 불이 켜졌습니다. 손자는 할머니 손을 제 점퍼 주머니에 넣어 주며 오늘 저녁은 자기가 차리겠다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방파제를 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