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을 시집보낸 부모는 사돈댁 앞에서 늘 한 수 접고 들어갑니다. 내 딸이 그 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생색 없이 슬쩍 보태 주는 일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름을 지우고 건넨 정성이 엉뚱한 이름을 달고 남의 집 거실에 걸리기도 합니다.
충청도 시골 마을에 사는 오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마흔 해 동안 산비탈 사과 과수원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아내는 5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고, 외동딸은 8년 전 수도권의 회사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딸의 시댁은 처음부터 어려웠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사돈어른은 오 씨의 거친 손을 내려다보며 “농사짓는 집 딸이라 일은 잘하겠네요” 하고 웃었습니다. 오 씨는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몰라 그저 고개만 숙였습니다.
명절마다 딸은 시댁 부엌에서 새벽부터 전을 부쳤습니다. 친정에 오면 “아빠, 시아버지는 친정 덕 본 게 하나도 없다고 하셔” 하며 웃는 얼굴로 눈가를 훔쳤습니다. 오 씨는 그때마다 사과 상자를 더 무겁게 채워 딸 차에 실어 주었습니다.
사위는 싹싹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첫해 가을에는 휴가를 내고 내려와 사흘 동안 사과를 땄습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도 “장인어른, 사과 따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하며 웃었습니다. 오 씨는 그날 저녁 사위 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 주며 마음을 놓았습니다.
작년 가을, 수확이 한창이던 무렵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아버지가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양쪽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비와 간병비까지 700만 원 가까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누이들은 서로 미루고, 사위는 형편이 안 돼 속만 태운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오 씨는 농협 통장을 꺼내 보았습니다. 15년 쓴 방제기를 바꾸려고 3년 동안 부은 적금이 800만 원쯤 있었습니다. 이웃 한 씨가 “그 고물 방제기로 올해를 넘기겠나” 하던 말이 떠올랐지만, 오 씨는 다음 날 아침 적금을 깼습니다.
오 씨는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네 통장으로 700만 원 보냈네. 내가 줬다 하지 말고 자네가 모은 돈이라고 하게. 그래야 저 애가 그 집에서 기를 펴고 살지.” 사위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장인어른, 이 은혜 평생 안 잊겠습니다” 하고 목이 메었습니다.
병문안을 가려 하자 사위가 말렸습니다. “요즘 병원 면회가 까다로워서요. 아버지께 장인어른 마음은 꼭 전해 드릴게요.” 오 씨는 대신 제일 굵은 부사 두 상자를 골라 병원으로 부쳤습니다.
그 한 해 동안 오 씨는 낡은 방제기를 고쳐 가며 썼습니다. 여름에 기계가 두 번이나 서서 한 씨네 것을 빌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딸이 “요즘은 시아버지가 나한테 말씀을 좀 부드럽게 하셔” 하면, 오 씨는 그것으로 됐다 싶었습니다.
올해 추석, 오 씨는 햇사과 세 상자를 트럭에 싣고 사돈댁에 인사를 갔습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고 아파트 주차장에는 명절 차들이 빼곡했습니다. 사돈어른은 지팡이 없이 현관까지 나와 오 씨를 맞았습니다. 오 씨는 그 걸음걸이를 보고 속으로 안도했습니다.
거실에 들어선 오 씨의 눈에 텔레비전 옆 장식장 위의 나무 감사패가 들어왔습니다. 금빛 글씨가 또렷했습니다. ‘효자 아들 고맙다. 아버지 무릎 수술비 700만원. 너의 효심을 평생 잊지 않겠다.’ 맨 아래에는 사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돈어른은 오 씨의 눈길을 따라가더니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월급 쪼개 몰래 모은 돈으로 수술을 시켜 줬어요. 딸들은 말뿐이고.”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습니다. “근데 사돈, 섭섭한 얘기 하나 합시다. 며느리 친정에서는 병문안 한 번을 안 오더라고요. 사과 한 알도 없고.”
오 씨는 찻잔을 쥔 손이 떨려 차를 쏟을 뻔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사위는 부엌 쪽으로 눈을 피했고, 딸은 행주를 쥔 채 바닥만 보고 있었습니다. 오 씨는 입술을 깨물고 “농사철이라 그만…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한 시간쯤 앉아 있다가 오 씨는 일어섰습니다. 주차장까지 따라 나온 딸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아빠, 미안해. 나도 알고 있었어. 그이가 그렇게 말해야 내가 그 집에서 숨 쉬고 산다고 해서… 나도 그게 편했어.”
돌아오는 길, 오 씨는 고속도로 졸음쉼터에 트럭을 세웠습니다. 와이퍼 소리만 들리는 운전석에서 핸들에 이마를 대고 혼자 울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딸이 아버지를 ‘병문안 한 번 안 온 사돈’으로 남겨 두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 가슴을 쳤습니다.
일주일 뒤, 오 씨는 사위를 과수원으로 불렀습니다. 창고 앞 평상에 마주 앉아 미리 써 둔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빌린 돈 700만 원, 빌린 날짜, 매달 20만 원씩 갚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네 이름으로 하라고 한 건 나네. 그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내가 보낸 사과 상자까지 없던 일로 만든 건 자네 잘못이네. 내 돈으로 자네 이름을 샀으면, 그 값은 자네가 치러야지.” 사위는 얼굴이 벌게진 채 차용증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오 씨는 딸에게도 말했습니다. “앞으로 사돈댁 일에는 아버지가 손 뗀다. 네 시집살이는 네 신랑이랑 둘이 풀어라. 아버지 돈으로 세운 체면은 오래 못 간다.” 딸은 대답 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벌써 두 달째 사위에게서 20만 원이 꼬박꼬박 들어옵니다. 오 씨는 그 돈을 모아 내년 봄 새 방제기 값에 보태기로 했습니다. 감사패 이야기는 사돈에게 끝내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위가 스스로 풀어야 할 몫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기를 살려 주려고 내 이름을 지우는 부모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름 없이 건넨 돈에는 받는 사람 마음대로 이름이 붙습니다. 도움은 조용히 주되, 누가 무엇을 했는지만큼은 분명히 남겨 두는 것이 서로를 지키는 길입니다.
자식의 시댁 일, 처가 일은 결국 자식 부부가 짊어질 몫입니다. 부모의 정은 그 길목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어도 대신 걸어 줄 수는 없습니다.
늦가을, 오 씨의 과수원에는 수확을 마친 사과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서 있습니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 오 씨는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겨 둔 사과 몇 알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산비탈 아래로 안개가 걷히자 오 씨는 전정가위를 챙겨 들고 첫 나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