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거지와 청소를 정확히 절반씩 나눴으니 우리 집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냉장고 속 반찬이 언제 떨어지는지, 아이 준비물이 무엇인지 매번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자.
전남여성가족재단 일·생활균형지원센터는 가사·돌봄 분담 프로젝트 ‘슬기로운 가정생활, 페어패밀리’에 참여한 가정을 분석한 논문을 학술지 ‘여성연구’ 2026년 제3호에 실었다. 논문 제목은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시화는 공정성과 젠더 분업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다. 이 연구는 집안일을 눈에 보이게 쪼개면 가족이 생각하는 ‘공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폈다.
◇ 100장의 카드, 100일의 실험
페어패밀리는 집에서 당연하게 처리되던 가사와 돌봄을 100가지 세부 역할로 나누고, 각 역할을 카드로 만들어 가족이 함께 확인하고 나눠 갖게 한 생활실험이다. 카드에는 요리나 청소처럼 손을 움직이는 ‘실행노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일을 미리 짚어내고, 일정을 맞추고, 생활용품 재고를 관리하는 ‘기획노동’도 별도 카드로 들어갔다. 참여 가족은 받은 카드에 적힌 역할을 100일 동안 책임지고 수행했다.
전남 16개 가족센터와 함께 진행한 1기에는 100가정이 참여했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100일을 끝까지 마치고 심층면담에 응한 13가정(외벌이 7가정, 맞벌이 6가정)을 조사했다. 남편과 아내를 따로 나눠 모두 4개 집단을 꾸렸고, 표적집단면접(FGI) 방식으로 참여 전후 집안일에 대한 인식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물었다.
◇ ‘반반’에서 ‘서로 알아주기’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공정함을 바라보는 기준이었다. 참여 가족들은 일을 기계적으로 절반씩 나누는 것보다,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그 수고를 인정하며 집안 사정에 맞게 함께 책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카드가 그동안 노동으로 여기지 않던 일들을 드러내 준 덕분이다.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확인하는 일, 떨어지기 전에 물건을 사두는 일, 아이의 학교 일정과 준비물을 챙기는 일도 가정을 굴러가게 하는 엄연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가족 모두가 인식하게 됐다.
그런데도 연구진은 한계를 분명히 짚었다. 눈에 보이는 일은 나뉘었지만 머릿속으로 계획하고 챙기는 일은 여전히 아내에게 몰려 있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그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이유 1. 기획노동은 끝나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설거지는 마치면 깨끗한 그릇이 남지만, 다음 주 장보기 목록을 떠올리거나 아이 일정을 머릿속으로 맞춰보는 일은 결과물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랫동안 집안일 목록에 오르지 못했다. 역할카드가 이 일을 꺼내 보여줬지만, 보이게 된 것과 실제로 넘겨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실행노동은 비교적 쉽게 나뉘었지만 기획노동은 기존 담당자 손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 이유 2. 외벌이 가정의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
외벌이 가정에서는 바깥일에 쓰는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가사와 돌봄이 다시 아내 쪽으로 기울었다. 집 밖 노동시간이 가정 안의 역할 분담을 좌우하는 구조가 그대로 작동한 셈이다.
◇ 이유 3. 맞벌이 가정의 “잘하는 사람이 하면 빠르다”
둘 다 일하는 맞벌이 가정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익숙하고 능숙한 사람이 맡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논리가 등장하면서 부담이 결국 아내에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그 일을 해온 사람이 더 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효율’의 논리는 기존 분업을 굳히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쉽다.
◇ “손을 보태는 데서 책임을 나누는 데로”
연구진은 일손을 돕는 수준을 넘어 가족생활을 계획하고 돌보는 책임 자체를 함께 지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 눈에 보이는 일을 물리적으로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계획과 돌봄의 책임까지 공유하도록 돕는 ‘가족관계 교육’을 가족정책에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개별 가정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노동시간 단축과 공적 돌봄 인프라 확충 같은 제도적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실질적인 일·생활 균형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판단이다.
이번 연구는 13가정을 심층 면담한 질적 연구여서 결과를 모든 가정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집안일을 ‘얼마나 나눴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알아채고 챙기는가’로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집안일 목록을 적어 본다면, 아무도 이름 붙이지 않았던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