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3 14:53

“동창회 쌀값 2000만원 대줬는데..” 신년회에 꽃다발이 들어오자 벌어진 일

오래 사귄 친구 사이에서는 셈을 따지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집니다. 누가 더 내고 덜 냈는지 묻는 순간 우정에 금이 갈 것 같아 말을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뜻밖의 자리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조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서울 변두리 동네 시장 골목 끝에서 30년째 방앗간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네 시면 밤새 쌀을 불려 둔 함지박부터 들여다보고, 명절 대목이면 가래떡 기계 앞에서 하루 열네 시간씩 서 있습니다. 남편은 기계를 손보고 배달을 맡습니다. 결혼한 아들과 딸은 각자 살림을 꾸려 경기도에 살고 있습니다.

조 씨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알아 온 친구 한 씨가 있습니다. 여고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50년이 넘은 사이입니다. 한 씨는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고 사람을 잘 모았습니다.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진 동창들을 다시 불러 모은 것도 한 씨였습니다. 그 뒤로 한 씨는 20년 넘게 동창회장을 맡아 왔습니다.

조 씨는 그런 친구가 늘 든든했습니다. 방앗간을 처음 열던 해, 한 씨는 동창들을 줄줄이 데리고 와 개업 떡을 몽땅 팔아 주었습니다. 조 씨가 친정어머니를 보내던 겨울에는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켰습니다. 조 씨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 씨 아들이 장가가던 날에는 폐백 떡을 새벽부터 손수 빚어 보냈고,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20년 전 가을, 한 씨가 방앗간에 찾아와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 동창회도 이제 좋은 일 하나 하자. 설마다 복지관 어르신들한테 떡국 대접하는 거야. 근데 떡이 문제다. 방앗간집, 네가 좀 맡아 줄래?”

조 씨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떡은 내가 뽑을게. 쌀값도 내가 낼게. 어르신들 드실 건데 남는 거 따지면 되겠니.” 한 씨는 손뼉을 쳤습니다. “역시 너밖에 없다. 쌀값은 복지관 계좌로 바로 보내. 입금자는 동창회 이름으로 하고.”

그날부터 조 씨는 대목 떡값에서 조금씩 떼어 따로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100만 원을 해마다 설 전에 복지관 계좌로 보냈습니다. 섣달그믐 새벽이면 쌀을 가마째 불려 가래떡을 뽑았고, 남편이 트럭에 실어 복지관 마당에 내려 주었습니다. 20년 동안 보낸 쌀값만 2000만 원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조 씨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손목이 시큰거려 떡 써는 일이 버거워졌고, 낡은 기계도 두 번이나 새로 들였습니다. 그사이 동창회 자리에서 조 씨는 점점 뒷자리로 밀려났습니다. 한 씨는 모임 때마다 “우리 동창회 나눔 행사”를 자랑했지만 떡이 어디서 오는지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 씨는 서운했지만, 좋은 일에 이름 따질 것 없다며 넘겼습니다.

올해 설 연휴 끝날, 동창 신년회가 동네 한정식집 별실에서 열렸습니다.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려 조 씨는 장화를 신고 나섰습니다. 별실에 들어서니 상 한가운데 투명한 감사패 하나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떡국 나눔 20년, 동창회장님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씨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씨가 잔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복지관에서 20년 공로라고 이걸 주더라. 내가 20년을 뛰어다닌 보람이 있지 뭐야.” 동창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누군가 “떡은 방앗간집이 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한 씨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아, 떡 좀 대 준 정도지. 행사 꾸리고 사람 모으고 복지관 상대한 건 다 나야.”

조 씨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상 위의 떡갈비가 식어 가는 것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새벽마다 불린 쌀과 시린 손목이 한꺼번에 부질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별실 문이 열리고 마흔 줄의 여성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복지관에서 떡국 행사를 맡아 온 사회복지사 윤 씨였습니다. 한 씨가 반색하며 일어섰지만 윤 씨는 그 앞을 지나 조 씨 앞에 멈춰 섰습니다.

“20년 동안 떡이랑 쌀값 대 주신 사장님이 이분 맞으시죠? 그동안 후원자 이름을 회장님이 끝까지 안 알려 주셔서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윤 씨는 해마다 떡을 내려 주던 트럭을 수소문해 방앗간을 찾아갔고, 남편에게서 이 자리를 전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입금자 이름은 늘 동창회였는데, 보내는 계좌는 해마다 같은 개인 통장이었어요. 회장님께 여쭤 보면 동창 하나가 심부름하는 거라고만 하셨고요. 기부금 영수증 한 장 못 챙겨 드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동창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잠깐만. 우리 해마다 떡값이라고 5만 원씩 냈잖아. 그 돈은 어디 갔어?” 윤 씨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냈습니다. 20년치 후원 기록이었습니다. 해마다 100만 원씩 스무 줄, 모두 조 씨 통장에서 들어온 돈이었습니다. “동창회 회비로 들어온 돈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원자 명단에는 회장님 성함만 올라 있었어요.”

서른 명 가까운 동창이 20년 동안 낸 떡값이 어디로 갔는지, 더 묻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씨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행사하다 보면 이것저것 드는 게 많아서…” 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감사패는 상 위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누구도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조 씨는 꽃다발을 받아 든 채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 나기보다 서글픈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50년을 믿어 온 친구의 얼굴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습니다. 조 씨는 한 씨를 향해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는 이름 바란 적 없어. 그런데 친구들 돈은 돌려줘라. 그건 어르신들 떡국 드시라고 낸 돈이잖니.”

며칠 뒤 동창들은 새 총무를 뽑고 회비 통장을 따로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기로 했습니다. 한 씨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동창들에게 걷은 돈을 나눠서라도 돌려주겠다는 연락을 돌렸습니다. 조 씨는 복지관에 내년 설에도 떡을 뽑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번에는 방앗간 이름을 내걸고, 동창들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선의는 이름을 내걸지 않을 때 더 빛납니다. 그래도 내 정성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한 번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셈을 묻는 것은 우정을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마음을 보탠 사람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오랜 친구에게 기대는 마음은 소중합니다. 다만 정이 깊을수록 돈은 투명하게 다뤄야 서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장부 한 장을 함께 펼쳐 보는 일이 50년 우정을 오래 가게 하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올가을 조 씨는 햅쌀이 들어오자마자 방앗간 한쪽에 쌀 두 가마를 따로 쌓아 두었습니다. 시장 골목에는 은행잎이 노랗게 깔렸고, 방앗간 굴뚝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습니다. 조 씨는 쌀자루에 ‘복지관 떡국’이라고 큼직하게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새 총무가 보내온 회비 내역 문자를 남편에게 보여 주며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OWN 뉴스

당신의 뉴스를 담습니다. 오늘의 건강부터 내일의 노후까지, 꼭 필요한 생활 정보를 전합니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