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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사이에도 끝내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가 반대할 게 뻔한 일일수록 혼자 정하고 혼자 품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어 둔 비밀은, 남의 욕심 앞에서 가장 뜻밖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경상도 바닷가 작은 도시에 사는 윤 씨는 올해 일흔입니다. 시장 골목에서 남편과 함께 41년 동안 떡집을 했습니다. 새벽 세 시면 쌀을 불려 시루에 김을 올렸고, 명절 대목이면 사흘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아들과 딸은 출가해 대도시에 살고, 부부는 떡집 건물 2층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지난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건물 1층 안쪽 살림집에는 강 씨 부부가 세 들어 살았습니다. 시장에서 생선 좌판을 하던 부부로, 20년 가까이 한 지붕 아래 지낸 사이였습니다. 윤 씨가 허리를 다쳐 누웠던 해에는 강 씨 아내가 한 달 내내 떡집 일을 거들었습니다. 강 씨네 막내가 열병으로 경기를 일으킨 밤에는 윤 씨가 아이를 업고 응급실로 뛰었습니다. 김장하는 날이면 두 집 배추가 한 마당에 나란히 쌓였습니다.
7년 전 겨울, 강 씨 부부가 시장 입구 새 상가에 횟집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좌판 생활을 벗어날 기회였지만 보증금이 4,000만 원 모자랐습니다. 어느 밤, 강 씨 아내가 떡집 셔터를 내리던 윤 씨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형님,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이소. 2년 안에 꼭 갚겠습니더.”
윤 씨에게는 남편도 모르는 통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떡값 잔돈과 단골들이 따로 쥐여 준 수고비를 조금씩 떼어 넣은 통장이었습니다. 남편은 젊은 시절 친구 보증을 섰다가 집을 날릴 뻔한 뒤로 “돈 거래는 형제하고도 안 한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꺼내면 반대할 게 불 보듯 뻔했습니다.
윤 씨는 혼자 은행에 갔습니다. 그 통장에서 4,000만 원을 강 씨 계좌로 보내며 메모 칸에 ‘상가 보증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상가 임대차 계약서 사본을 한 부 받아 두었습니다. “차용증 쓰자 소리는 안 하께. 대신 이 돈이 어디 들어갔는지는 내가 알아야 안 되겠나. 우리 영감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래이.” 강 씨 부부는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횟집은 첫해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강 씨는 두어 번 30만 원씩 내밀더니 그 뒤로는 말이 없었습니다. 장사가 기울었다는 소문에 윤 씨는 재촉하지 못했습니다. 계단에서 마주쳐도 강 씨 부부의 인사는 점점 짧아졌습니다. 3년 전에는 남편이 떡집 계산대 서랍에 두고 쓰던 막도장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남편은 온 시장을 뒤지다 끝내 새로 하나를 팠습니다.
남편의 사십구재를 치르고 한 달 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윤 씨는 아들, 딸과 함께 법무사 사무실 탁자에 앉았습니다. 탁자 위에는 건물 등기부등본과 예금 잔액 증명서, 남편의 인감도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윤 씨의 핸드백 속에는 떡집 통장도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자식들에게 다 털어놓겠다고 마음먹고 온 길이었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강 씨 부부가 들어섰습니다. 강 씨가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송구합니더. 형님이 생전에 떡 기계 바꾼다고 저희한테 5,000만 원을 빌려 가셨습니더. 유산 나누시기 전에 이것부터 정리해 주셔야 안 되겠습니꺼.”
종이는 차용증이었습니다. 남편 이름 석 자 옆에 붉은 도장이 선명했습니다. 아들이 얼굴을 붉혔습니다. “아버지는 남한테 돈 빌릴 분이 아니에요.” 법무사가 차분히 말했습니다. “고인의 빚도 상속이 되니, 사실이라면 정리하셔야 합니다. 다만 돈이 실제로 건너간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강 씨 아내가 얼른 받았습니다. “현금으로 드렸지예.”
윤 씨는 말없이 핸드백을 열었습니다. 떡집 통장과 접힌 계약서 사본을 꺼내 차용증 옆에 나란히 펼쳤습니다. “돈 빌려 간 쪽이 누군지는 이게 말해 줄 기다.” 통장에는 7년 전 12월, 강 씨 앞으로 보낸 4,000만 원과 ‘상가 보증금’이라는 메모가 찍혀 있었습니다. 계약서의 보증금 날짜도 바로 그 주였습니다.
차용증을 들여다보던 딸이 소리를 높였습니다. “엄마, 이거 아버지 막도장 아니에요? 테두리 깨진 거.” 윤 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다. 3년 전에 계산대 서랍에서 없어졌다고 니 아버지가 그래 찾던 그 도장이다.” 법무사가 안경을 고쳐 썼습니다. “남의 도장으로 서류를 꾸민 거라면 사문서위조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강 씨 아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리고 엉겁결에 소리쳤습니다. “형님이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 캤잖아예!”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윤 씨가 자식들 앞에서 그 비밀을 끝내 꺼내지 못하리라 믿고 벌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엄마, 아버지 몰래 이 큰돈을…….” 윤 씨는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니 아버지 알면 펄쩍 뛸 줄 알았다. 그래도 20년 한집 산 사람들이 우는데 우째 모른 척하노. 오늘 이 통장 너거한테 보여 줄라고 들고 왔다.” 딸이 엄마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엄마 혼자 7년을 어떻게 품고 살았어.”
아들은 당장 고소하자고 했지만 윤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서 강 씨 부부에게 4,000만 원을 1년 안에 갚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공증까지 받아 두었습니다. 강 씨 부부는 횟집을 정리해 반년 만에 돈을 모두 갚고 건물을 떠났습니다. 윤 씨는 돌려받은 돈을 떡집 통장에 다시 넣고, 그 통장을 자식들 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이제 이 집에 비밀 통장은 없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차용증 한 장을 앞세워 살 1파운드를 요구하지만, 끝내 그 증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습니다. 욕심으로 꾸민 종이는 진실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가족 몰래 돈을 건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이체 내역과 계약서 같은 기록은 꼭 남겨 두세요. 그리고 언젠가는 믿을 수 있는 가족에게 털어놓으세요. 그 기록과 고백이 남은 가족을 지켜 줍니다.
늦가을 어느 저녁, 윤 씨는 딸과 함께 시장 뒤편 방파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다 위로 갈매기가 낮게 날았고, 저녁노을이 등대 끝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윤 씨는 딸의 팔짱을 끼고 해가 다 질 때까지 방파제를 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