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5 13:22

“자식 셋 집에 반찬 택배 보냈는데..” 칠순 날 손녀가 올린 사진 한 장에 말문이 막혔다

부모에게 자식은 몇 살이 되어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입니다. 멀리 사는 자식에게 해 줄 것이 마땅치 않으면 엄마는 손으로 만든 반찬이라도 보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그 정성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면, 정작 엄마의 자리는 아무도 챙기지 않게 됩니다.

경상도 산골 마을에 사는 박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스물셋에 시집와 남편과 함께 마흔다섯 해 동안 고추 농사를 지었습니다. 남편은 8년 전 봄, 고추 모종을 옮겨 심던 날 밭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 씨에게는 큰아들과 딸, 막내아들 이렇게 자식이 셋 있고, 셋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서 가정을 꾸리고 삽니다.

고추 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 봄에 모종을 내고, 여름 장마에는 탄저병이 돌까 밤잠을 설치고, 늦여름 뙤약볕 아래 붉은 고추를 한 자루씩 땁니다. 박 씨 부부는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 셋을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큰아들이 고3이던 겨울, 박 씨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읍내 독서실까지 도시락을 날랐습니다. 딸이 시집갈 때는 그해 고추를 판 돈을 통째로 털어 혼수를 장만해 주었습니다. 막내아들이 군대에 있을 때는 닭볶음탕을 보온 도시락에 담아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면회를 갔습니다. 막내는 그 닭볶음탕을 먹으며 “엄마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했습니다.

남편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올라가던 날, 큰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이제 농사 그만하시고 편히 지내세요.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밭이 놀면 사람도 아프다. 너희는 바쁘니까 밥이나 잘 챙겨 먹어라.”

그 주부터 박 씨는 반찬을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나물을 데쳐 무치고, 멸치볶음과 장아찌를 담고, 직접 빻은 고춧가루를 작은 봉지에 나눠 넣었습니다. 목요일 아침에는 아이스박스 세 개를 경운기에 싣고 읍내 택배 대리점으로 갔습니다. 택배비만 한 달에 칠만 원이 넘었고, 재료값까지 치면 고추 판 돈의 상당 부분이 반찬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해는 자식들이 꼬박꼬박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고사리 너무 맛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상자가 잘 도착했다는 문자 한 줄도 뜸해졌습니다. 딸네 집에 들렀을 때 냉장고 구석에서 뚜껑도 따지 않은 반찬통이 곰팡이를 피운 채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딸은 “애들이 요즘 나물을 안 먹어서” 하며 얼른 통을 치웠습니다. 박 씨는 서운했지만 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상자를 쌌습니다. 빈 반찬통이 돌아오지 않아 박 씨 집 창고에는 새로 산 통과 상자가 쌓여 갔습니다.

그리고 올해 구월, 칠순을 한 달 앞두고 막내아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칠순은 식당 말고 집에서 해요. 엄마 밥 먹고 싶어요. 우리 셋 다 내려갈게요.” 박 씨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박 씨는 이틀 전부터 장을 봤습니다. 갈비를 핏물 빼서 재우고, 당면을 삶아 잡채를 버무리고,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쳤습니다. 동그랑땡과 호박전, 고사리·도라지·시금치 삼색나물, 조기구이, 도토리묵, 식혜와 수정과까지 꼭 열두 가지였습니다. 무릎이 쑤셔 밤에는 파스를 붙이고 잤습니다.

칠순 날은 하늘이 맑았습니다. 박 씨는 아침부터 큰 상 두 개를 이어 붙이고, 손주들 몫으로 작은 그릇을 따로 꺼냈습니다. 대문은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해가 뒷산으로 넘어가도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차는 없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 딸에게서 첫 문자가 왔습니다. [엄마, 작은애가 열이 나서 못 갈 것 같아. 미안해.] 여섯 시에는 큰아들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요. 다음에 꼭 갈게요.] 하고 보냈습니다. 막내아들은 전화도 받지 않다가 여덟 시가 넘어서야 [엄마 죄송해요]라고 짧게 보냈습니다.

밤 아홉 시, 갈비찜 위로 기름이 하얗게 굳었습니다. 박 씨는 식은 잡채 접시를 한참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지난 추석에 큰손녀가 할머니도 사진 구경하라며 깔아 준 앱이 있었습니다. 손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맨 위에 오늘 올라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호텔 뷔페의 하얀 식탁보 앞에 큰아들 내외와 딸네, 막내네까지 세 집 식구가 빠짐없이 모여 웃고 있었습니다. 열이 난다던 딸네 작은애는 케이크 앞에서 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사진 아래에는 [외할아버지 회갑 축하드려요! 온 가족 총출동]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큰며느리 친정아버지의 회갑연이었습니다.

박 씨는 휴대전화를 쥔 채 말문이 막혔습니다. 화도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열두 가지 음식이 놓인 상이 갑자기 아주 낯설게 보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막내아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형수님 아버님 회갑이랑 날짜가 겹쳐서요. 엄마 칠순은 다음 달에 몰아서 하자고 셋이 정했어요. 형이 엄마한테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박 씨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끼리 정했구나.”

전화를 끊은 박 씨는 음식을 다시 데워 큰 쟁반에 나눠 담고 마을회관으로 날랐습니다. 옆집 윤 씨 할머니가 놀라 물었습니다. “아이고, 이게 다 뭐요. 자식들 온다더니.” 박 씨는 웃었습니다. “안 왔어요. 우리가 먹읍시다.” 어르신들은 상을 둘러싸고 앉아 그릇을 비웠고, 누군가 생일 노래를 시작하자 회관 안에 박수 소리가 번졌습니다.

그다음 날 박 씨는 창고 문을 열었습니다. 8년 동안 쌓인 아이스박스와 상자, 반찬통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꺼냈습니다. 쓸 만한 통은 회관 부엌에 갖다 두고, 상자는 고물상에 넘겼습니다.

그러고는 그 길로 읍내 복지관에 가서 노인대학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박 씨는 볼펜을 쥐고 한참 망설였습니다. 평생 누구 엄마, 누구네 댁으로만 불렸지 제 이름 석 자를 서류 맨 위에 써 본 일이 없었습니다. 수업료는 반찬 택배에 들던 한 달 치 돈이면 충분했고, 목요일마다 택배 대리점에 가던 그 시간에 서예 교실이 있었습니다.

그 주 목요일, 상자가 오지 않자 자식들이 차례로 전화를 했습니다. 박 씨는 짧게 답했습니다. “이제 목요일엔 엄마 학교 간다. 다음 달 잔치도 하지 마라. 엄마 생일은 지났다.”

정성은 받는 사람이 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정성이 됩니다. 말없이 주기만 하면 자식은 그것이 엄마의 몸과 시간을 덜어 낸 것인 줄 모릅니다. 주던 것을 멈추는 것은 자식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 된 하루를 챙기셔도 됩니다.

십일월 첫 서리가 내린 아침, 박 씨는 가방을 메고 고추밭 둑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고춧대를 뽑아낸 빈 고랑마다 하얀 서리가 반짝였고, 먼 산자락에는 마지막 단풍이 붉게 남아 있었습니다. 박 씨는 그 길을 처음 걷는 사람처럼 천천히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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