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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가 버팀목을 잃었다. 지난 4개월간 외국인 매물을 받아낸 쪽은 개인도 기관도 아니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사주 매입이 그 물량을 흡수했다. SK하이닉스가 21일 매입을 마치면서 두 대형주가 깔아두었던 바닥이 모두 사라졌다. 시장의 관심은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에 쏠린다. 정부 주도의 증권시장안정펀드(증안펀드)가 거론되지만, 수급 규모를 따져보면 기대를 낮춰야 한다.
◇ 84조 매도를 누가 받았나
수급 지형부터 보자. 한국거래소 집계로 6월 23일부터 10월 22일까지 82거래일 동안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약 84조6600억원을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개인의 순매수는 23조2000억원, 기관은 7조1000억원에 그쳤다. 나머지 대부분은 기타법인 계정의 54조2000억원 순매수가 메웠다. 이 계정의 실체는 사실상 두 반도체 대장주의 자사주 매입이다.
삼성전자는 8월 24일부터 10월 6일까지 15조원을 들여 자사주 약 5686만주를 사들였다. SK하이닉스는 8월 20일부터 10월 21일까지 40조원을 투입해 약 2369만주를 확보했다. 두 회사가 쓴 돈은 합계 55조원으로, 외국인 순매도의 3분의 2가량을 기업이 직접 받아낸 셈이다. 지수 레벨은 무너졌지만 하락 속도를 늦춘 완충재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다.
◇ 방패가 빠진 뒤 벌어진 일
완충재가 빠지자 결과는 바로 숫자로 나왔다. 삼성전자의 매입이 끝난 10월 6일 코스피는 6941.39로 마감했다. 이후 6거래일 연속 밀려 15일에는 5554.22까지 내려앉았다. 누적 하락률은 19.98%로, 지지 매수 하나가 사라진 것만으로 지수가 2할 가까이 증발한 것이다.
이 경험 때문에 SK하이닉스의 매입 종료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안하다. 매입이 끝난 다음 날인 22일 코스피는 3.52% 밀린 5533.77로 마감해 20일 종가(5552.74)마저 내줬다. 23일에는 장중 5305선까지 빠졌다가 강보합으로 돌아섰다. 다만 이날도 외국인은 1조원 넘게 팔았고, 기관 매수가 이를 겨우 상쇄했다. 반등의 질이 견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 국내 투자자의 매수 여력도 줄었다. 투자자 예탁금은 6월 중순 130조원에서 최근 100조원 수준으로 30조원가량 감소했다. 한때 80조원에 이르던 하루 거래대금도 8월 중순 이후 30조원을 밑돌고 있다. 6월 22일 기록한 사상 최고치 9114.55 대비 낙폭은 이미 39%를 넘었다. 지수가 ‘급락→반등→횡보→재급락’을 되풀이하며 9100에서 5500, 다시 7000을 거쳐 5500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매수 주체는 점점 얇아졌다.
◇ 국민연금은 여력이 불투명하다
국민연금이 남은 카드로 꼽히지만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 국민연금은 앞서 국내 주식 비중 조정(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유예했다. 지수가 고점에서 40% 가까이 빠지면서 국내 주식 비중이 목표치 대비 얼마나 낮아졌는지, 추가로 담을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유예 조치가 오히려 기계적 매수 신호를 흐리게 만든 측면도 있다. 시장이 ‘연금 매수’를 상수로 놓고 계산하기 어려운 이유다.
◇ 증안펀드, 규모의 벽
그래서 증안펀드 가동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투자 관점에서는 세 가지를 따져봐야 한다.
첫째는 체급이다. 2020년 코로나 충격 당시 조성된 증안펀드는 10조원대 규모였다. 비슷한 수준이 다시 만들어진다 해도, 석 달 남짓한 기간에 55조원을 쏟아부은 자사주 매입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작다. 외국인이 하루 1조원씩 파는 장에서 10조원 안팎의 자금은 열흘 남짓이면 소진될 수 있다.
둘째는 방향성이다. 증안펀드는 대체로 지수 전체를 사는 구조여서, 매도가 집중되는 반도체 대형주에 화력을 몰아주기 어렵다. 외국인이 올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각각 80조원대 규모로 처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산 매수로는 핵심 매물대를 소화하기 힘들다.
셋째는 신호 효과의 양면성이다. 정부가 펀드를 내놓으면 ‘바닥은 정책이 받친다’는 심리적 안전판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당국이 나설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해석이 퍼지면 외국인의 탈출 시점을 앞당기는 역효과도 배제할 수 없다. 과거 사례에서도 증안펀드는 실제 집행보다 발표 자체의 심리 효과가 더 컸다는 평가가 많다. 아직 정부가 가동 여부조차 결정하지 않은 만큼, 현재로서는 ‘검토 중인 옵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 투자 시그널: 받침대가 아니라 ‘매도 소진’을 봐야
정리하면 증안펀드는 급락 국면에서 낙폭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진정제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 매도를 구조적으로 흡수하는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지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외국인 매도의 강도가 꺾이느냐다.
점검할 지표는 다음과 같다.
① 외국인 일간 순매도가 조 단위에서 수천억원 단위로 줄어드는지
② 반도체 대형주에서 외국인 매도가 멈추고 비중 재확대 조짐이 보이는지
③ 예탁금이 100조원 선에서 하락을 멈추고 반등하는지
④ 국민연금이 리밸런싱 재개 여부와 범위를 명확히 하는지
기회 요인도 있다. 연속 급락 이후 시장이 극단적 과매도 구간에 들어선 것은 사실이고, 올해 두 자릿수 급락 뒤에는 평균 2~3주 안에 낙폭을 되돌린 전례도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반등을 밀어 올릴 기업 자금이 사라진 상태다. 7월 초 8000선에서 밀린 뒤 회복하지 못한 사례처럼, 반등이 짧게 끝날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현 시점의 전략은 분할 접근이 합리적이다. 정책 기대만 보고 한 번에 비중을 늘리기보다, 외국인 수급 전환이 확인되는 구간마다 단계적으로 비중을 높이는 편이 낫다. 신용과 레버리지를 동원한 저가 매수는 계단식 하락이 한 칸 더 이어질 경우 손실을 키우는 함정이 될 수 있다. 55조원짜리 방패가 내려간 자리를 정책 펀드가 대신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지금으로서는 낙관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