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이 살 집에 돈을 보태는 부모는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발 뻗고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누구의 이름으로 남았는지 알게 되는 날, 부모는 내가 건넨 것이 정이었는지 그저 돈이었는지 묻게 됩니다.
충청도의 한 소도시 재래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이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서른넷에 남편과 시장 안쪽 골목에 떡방앗간을 차린 지 꼭 30년이 됐습니다. 남편은 12년 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이 씨는 혼자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쌀을 불리고 시루를 올렸습니다. 큰아들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고, 둘째 딸은 결혼해 이웃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 딸은 이 씨에게 각별한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던 해 고등학생이던 딸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가게로 와 앞치마를 둘렀습니다. 대목이면 밤늦도록 송편을 빚었고, 손끝에 물집이 잡혀도 “엄마, 나 이제 엄마보다 빨라” 하며 웃었습니다.
수능 날 아침, 이 씨가 시험장 앞에서 찹쌀떡 상자를 건네자 딸은 엄마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중에 이 가게 내가 물려받을게. 엄마는 그때 쉬어.” 이 씨는 그 말을 30년 떡집 일의 가장 큰 보람으로 품고 살았습니다.
4년 전 딸은 같은 회사에 다니던 사위와 결혼했습니다. 사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란 외아들이었습니다. 신혼집을 보러 다니던 딸이 어느 날 밤 가게에 와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둘이 모은 돈으로는 변두리 원룸 전세도 빠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는 이튿날 은행에 가서 적금 두 개를 깼습니다. 명절 대목마다 번 돈을 떼어 10년 넘게 부은 적금이었습니다. 모자란 돈은 노후에 쓰려던 예금까지 헐어 7000만원을 맞췄습니다.
“신혼집은 마음이 편해야 한다. 이걸로 방 두 칸짜리 전세 얻어라.” 통장을 받아 든 딸이 울먹였습니다. “엄마, 이 큰돈을 어떻게 받아.” 옆에 있던 사위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장모님, 형편 풀리면 꼭 갚겠습니다.” 이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갚는 얘기는 나중에 하세. 지금은 둘이 잘 사는 게 먼저야.” 서류는 한 장도 쓰지 않았습니다. 자식에게 돈을 주며 종이를 내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 뒤 4년 사이 딸의 발길은 조금씩 뜸해졌습니다. 손녀가 태어나고부터는 명절에도 시댁에 먼저 들렀다가 친정에는 저녁 무렵 잠깐 얼굴만 비쳤습니다. 이 씨는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추석 송편을 빚으면서도 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옆 가게 반찬집 박 씨가 “딸은 요새 안 와?” 하고 물으면 “애 키우느라 바쁘지”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지난봄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세를 빼서 신도시에 아파트를 샀으니 집들이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는 전날 새벽 두 시에 일어나 팥을 삶았습니다. 새집에 궂은일이 들지 말라고 붉은 팥고물을 두툼하게 올려 시루떡 한 판을 쪘습니다.
집들이 날은 봄비가 가늘게 내렸습니다. 이 씨는 보자기에 싼 시루떡을 무릎에 올리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탔습니다. 15층 현관문을 열자 시어머니와 시댁 친척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거실 바닥은 반들반들 윤이 났고, 통유리창 너머로 새로 생긴 공원이 내려다보였습니다.
이 씨의 눈은 거실 벽에 걸린 큰 액자에 멈췄습니다.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습니다. 가운데 시어머니가 앉고 딸 부부와 손녀, 시누이 식구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그 사진 어디에도 이 씨나 큰아들의 얼굴은 없었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말을 이 씨는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상이 차려지자 사위가 잔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 집을 장만한 건 다 저희 어머니가 보태 주신 덕분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시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웃었고 박수가 터졌습니다. 이 씨는 딸을 바라보았습니다. 딸은 남편 옆에서 잔을 든 채 웃고만 있었습니다. 이 씨가 들고 온 시루떡은 부엌 구석에 보자기째 놓여 있었습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시어머니가 이 씨 옆에 와 앉았습니다. “사부인, 집 좋지요? 명의는 우리 아들하고 나하고 반반으로 해 뒀어요. 요즘 세상에 혹시 모르잖아요.” 이 씨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집에는 4년 전 자신이 깬 적금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어디에도 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이 씨는 딸을 베란다로 불렀습니다. “얘야, 엄마가 준 전세금도 이 집에 들어간 거 아니냐. 그런데 네 이름은 왜 없어?” 딸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엄마, 그 돈은 결혼 선물로 끝난 얘기잖아. 남의 집들이에서 그걸 왜 따져. 엄마 이러면 나 정말 서운해.”
‘남의 집들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현관을 나섰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빗줄기가 굵어졌습니다.
그날 밤 이 씨는 불 꺼진 떡집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친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 것이 아팠습니다. 이대로라면 30년 일군 이 가게도 같은 길을 가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주일 뒤 이 씨는 딸 부부를 가게로 불러 서류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4년 전 건넨 7000만원을 빌려준 돈으로 확인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갚을 날은 정하지 않되, 해마다 한 번 형편을 알려 달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딸이 “엄마,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며 눈물을 보이자 사위가 먼저 펜을 들었습니다. “장모님, 그때 제가 갚겠다고 했습니다.” 딸도 한참 만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이 씨는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가게는 너한테 물려주려고 했다. 그 생각은 접었다. 10년 동안 나랑 새벽을 같이 연 최 씨한테 넘기기로 했다.” 그 뒤로 이 씨는 딸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전화를 거는 일도 없었습니다.
자식에게 주는 돈에 이름표를 붙이는 일은 야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돈은 받는 쪽에서 가장 먼저 잊힙니다. 서류는 돈을 돌려받으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담긴 땀을 기억해 달라고 남기는 것입니다.
정이 깊을수록 선을 분명히 그어 두어야 오래 갑니다. 내 몫을 지키는 일은 자식을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함부로 지우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올가을 이 씨는 가게 문을 닫은 일요일, 박 씨와 함께 시장 뒤 하천 둑길을 걸었습니다. 억새가 바람에 하얗게 누웠다 일어섰고, 물 위로 저녁 해가 길게 번졌습니다. 이 씨는 박 씨가 싸 온 식혜를 나눠 마시며 해가 질 때까지 둑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