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4 12:31

“자식 넷에게 김장 300포기 보냈는데..” 석 달 뒤 자식들이 두른 앞치마에 주저앉아 울었다

해마다 늦가을이면 부모님 댁에서 김치통이 오는 집이 많습니다. 받는 자식은 당연하게 여기고, 보내는 부모는 그 일을 낙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김치 한 통에 부모의 무릎과 허리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헤아리는 자식은 많지 않습니다.

서울 변두리 동네에 사는 조 씨는 올해 일흔둘입니다. 시장 골목 끝에서 35년 동안 방앗간을 했고, 4년 전 무릎이 나빠지면서 기계를 내놓았습니다. 남편은 10년 전 세상을 떠났고, 2남 2녀는 모두 출가해 각자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방앗간 시절 조 씨의 손은 늘 붉었습니다. 가을이면 하루 종일 고추를 빻느라 매운 가루를 뒤집어썼고, 아이들은 재채기를 하며 가게 뒤 쪽방에서 숙제를 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지금도 “우리 집 냄새는 고춧가루 냄새”라고 말하곤 합니다.

김장을 크게 하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 맏딸이 결혼해 처음 살림을 났을 때였습니다. 신혼집 냉장고가 텅 빈 것을 본 조 씨는 그해 배추를 갑절로 절였습니다. “김치만 있으면 밥은 안 굶는다.” 자식이 하나씩 짝을 찾을 때마다 배추가 늘었고, 어느새 해마다 300포기가 되었습니다.

고춧가루는 방앗간에서 직접 빻았고, 새우젓과 생새우는 시장 젓갈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랐습니다. 배춧값과 양념값은 방앗간 가을 수입에서 따로 떼어 두었고, 가게를 닫은 뒤로는 연금을 쪼개 모았습니다. 김장날이면 방앗간 단골이던 이웃 윤 씨 할머니가 와서 함께 속을 넣었고, 남편은 살아생전 김치통을 트럭에 싣고 네 집을 돌았습니다.

둘째딸은 아이를 낳고 몸조리할 때 어머니 묵은지로 끓인 찌개를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큰아들은 지방 현장에 내려가 있을 때도 어머니 김치를 택배로 받아 동료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사위와 며느리들도 “어머님 김치 없으면 겨울 못 나요” 하며 빈 통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무릎부터 찾아왔습니다. 몇 해 전부터 조 씨는 김장을 마치면 사흘씩 앓아누웠습니다. 지난겨울에는 배추를 나르다 마당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자식들 앞에서는 파스 붙인 무릎을 바지로 가렸습니다. “엄마는 괜찮다. 너희 통이나 챙겨 가라.”

올여름 무릎이 퉁퉁 부어 막내아들과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연골이 많이 닳았다며 쪼그려 앉는 일과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은 피하라고 했습니다. 조 씨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습니다.

그리고 8월 말, 맏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올해부터 김장 그만해요.” 조 씨는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 이제 엄마 김치가 입에 안 맞는가 보구나.” 맏딸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지만 조 씨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주말마다 들르던 자식들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전화를 걸면 어딘가 시끄러운 곳에서 서둘러 끊었습니다. 조 씨는 빈 김치냉장고를 열어 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늙은 어미 김치는 이제 짐이구나.”

서운함은 오기가 되었습니다. 조 씨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장 채소가게에 배추 50포기를 주문했습니다. 많이는 못 해도 네 집에 한 통씩은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날짜는 30년 동안 김장을 해 온 11월 셋째 주 토요일로 잡았습니다.

김장날 아침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장독 뚜껑에는 하얗게 서리가 앉았고, 입김이 길게 흩어졌습니다. 조 씨는 무릎에 파스를 두 장 붙이고 고무장갑을 챙겨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담장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 씨가 마당 문을 열었습니다. 골목에 커다란 고무 대야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절인 배추가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대야 옆 가스버너 위에서는 찹쌀풀이 뭉근히 끓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자식 넷과 사위, 며느리, 손주들까지 열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모두 똑같은 꽃무늬 앞치마를 둘렀고, 가슴께에는 조 씨의 이름 석 자가 붉은 실로 수놓여 있었습니다.

맏딸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엄마, 올해 김장은 저희가 해요. 300포기 어제 다 절여 놨어요.” 조 씨는 고무장갑을 쥔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막내 손녀가 같은 앞치마 하나를 두 손으로 내밀었습니다. “할머니는 이거 입고 평상에 앉아서 맛만 보세요.”

그때 배추 더미 뒤에서 윤 씨 할머니가 웃으며 나왔습니다. “형님, 나 원망하지 마요. 애들이 석 달 동안 주말마다 우리 집에 와서 졸라 대는데 어떻게 안 가르쳐 줘요.”

사연은 이랬습니다. 병원에 따라갔던 막내아들이 의사의 말을 형제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식들은 말려도 어머니가 김장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어머니 곁에서 속을 넣어 온 윤 씨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고춧가루와 찹쌀풀의 비율, 생새우를 얼마나 넣는지, 배추를 몇 시간 절이는지 하나하나 공책에 받아 적었습니다. 주말마다 연락이 끊겼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맏딸이 덧붙였습니다. “채소가게 배추는 제가 어제 취소했어요. 엄마는 꼭 거기서 시키실 줄 알았거든요.”

큰아들이 어머니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30년 동안 받기만 했잖아요. 이제 엄마 김장은 저희가 담가 드릴게요.” 조 씨는 마당 문턱에 그대로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날 마당은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습니다. 사위들은 배추를 날랐고, 며느리들은 속을 버무렸고, 손주들은 서툰 손으로 배춧잎 사이사이에 양념을 발랐습니다. 조 씨는 평상에 앉아 둘째딸이 입에 넣어 준 김치 한 쪽을 오래 씹었습니다. “어쩜, 내 맛이랑 똑같네.” 해 질 무렵 자식들은 김치통을 조 씨 집 김치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웠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의 김치냉장고가 자식들이 담근 김치로 가득 찼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정성은 늘 아래로 흐르고, 자식은 그것을 당연히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래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자식은 언젠가 그 사랑을 거꾸로 흘려보낼 줄도 압니다.

부모님 댁에서 김치통이 오거든 통 속 김치만 보지 말고 그 김치를 담근 무릎도 한 번 살펴보세요. 올해는 받기만 하던 손으로 부모님 김장을 함께 해 드리면 어떨까요. 그 하루가 부모님께는 어떤 김치보다 든든한 겨울 양식이 될 것입니다.

김장을 마친 이튿날, 조 씨는 손주들 손을 잡고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옛 방앗간 자리에는 작은 꽃집이 들어서 있었고, 골목에는 첫눈이 소복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조 씨는 눈 덮인 골목을 손주들과 나란히, 해가 질 때까지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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