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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를 키워 준 시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가방을 챙겨 주고 교문 앞에서 손을 흔들던 날들은 통장에도, 장부에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키운 손주가 할아버지를 멀리하기 시작하면, 그 서운함을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어렵습니다.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사는 조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스물네 살에 시내버스 운전대를 잡아 꼬박 30년 동안 같은 도시의 노선을 달렸습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시장 골목 끝의 낡은 2층 주택에 살고, 외동딸 내외는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삽니다.
조 씨가 가장 오래 몬 버스는 시장 앞을 지나 저수지 마을 종점까지 가는 노선이었습니다. 새벽 첫차를 몰려면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운전석 옆 동전통에서 잔돈을 거슬러 주던 손은 지금도 습관처럼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립니다.
딸은 종합병원 간호사였고, 사위는 공단의 부품 공장에서 교대 근무를 했습니다. 손자가 태어나자 아내가 낮 동안 아이를 맡았습니다. 손자는 다섯 살 무렵부터 할아버지 버스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손자를 데리고 정류장에 나오면, 조 씨는 맨 앞자리에 손자를 앉히고 종점까지 달렸습니다. “할아버지, 이 버스 할아버지 거야?” “그럼, 이 자리가 할아버지 자리다.” 손자는 종점에 닿을 때마다 손뼉을 쳤습니다.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봄, 딸이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빠, 엄마 허리가 저래서 등하교까지는 못 맡기겠어. 학교가 버스로 네 정거장인데 혼자 보내기는 겁나고….” 조 씨는 정년을 여섯 해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운전대는 남이 잡아도 되지만, 손주 손은 내가 잡아야지.”
그날부터 6년 동안 조 씨는 아침마다 손자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고, 오후 두 시면 교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굣길 정류장 의자에 앉으면 늘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자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떡볶이 사 먹어라. 오늘도 잘 버텼다.” 그 천 원을 마련하려고 조 씨는 연금이 들어오는 날마다 은행에 가서 만 원짜리를 천 원짜리 한 묶음으로 바꿔 왔습니다.
그런데 손자가 5학년이 되던 무렵부터 달라졌습니다. 교문 앞에서 조 씨를 보면 친구들 눈치부터 살폈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교문 앞에 오지 마. 애들이 아기냐고 놀려. 창피해.” 그 뒤로 손자는 조 씨와 열 걸음쯤 떨어져 걸었고, 버스에서도 멀찍이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조 씨는 그래도 정류장에서 천 원을 내밀었고, 손자는 얼굴도 보지 않고 받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아내는 밤마다 남편을 달랬습니다. “다 크느라 그래요. 서운해 마요.” 조 씨는 웃어넘겼지만, 졸업식 날 손자가 할아버지와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친구들에게 달려갔을 때는 혼자 운동장 끝에 서서 한참을 하늘만 보았습니다.
중학생이 된 손자는 혼자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 명절에 와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다 갔습니다. 그렇게 8년이 흘렀습니다.
손자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던 날은 이른 봄이었습니다. 신병교육대 연병장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렸고, 가족들은 우산을 받쳐 든 채 저마다 아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조 씨는 아내와 딸 내외 뒤에 조금 떨어져 섰습니다. 손자가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그런 것이었습니다.
까까머리가 된 손자는 엄마를 안고, 아빠와 악수하고, 할머니 등을 두드렸습니다. 그러고는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조 씨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어른 팔뚝만 한 분홍색 돼지저금통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거 맡아 주세요.”
손자는 저금통과 함께 네 번 접은 쪽지를 조 씨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저금통은 생각보다 묵직했습니다. 조 씨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입소 안내 방송이 울렸고, 손자는 거수경례를 한 번 하더니 뒤돌아 뛰어갔습니다. 조 씨는 그 뒷모습이 장병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진눈깨비를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 저금통 밑에 마개 있어. 열어 봐.”
조 씨가 마개를 비틀자 접힌 지폐가 무릎 위로 쏟아졌습니다. 전부 천 원짜리였습니다. 딸이 울먹였습니다. “아빠가 6년 동안 준 돈이야. 한 장도 안 썼대. 기숙사 갈 때도 이것만은 우리 집 장롱에 넣어 두고 갔어.”
그날 밤 조 씨 부부는 거실 바닥에 앉아 지폐를 한 장씩 폈습니다. 모두 1,128장, 112만 8천 원이었습니다. 30년 동안 승객의 잔돈을 세던 손이 그날따라 자꾸 떨렸습니다.
쪽지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1학년 때는 할아버지 버스 사 드리려고 모았어요.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나 때문에 운전 그만둔 걸 엄마한테 듣고 나서는 더 못 쓰겠더라고요. 창피하다고 한 거 미안해요. 할아버지 버스 운전석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자리였어요. 제대하면 이 돈으로 할아버지랑 버스 종점까지 여행 가요.]
조 씨는 쪽지를 든 채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열 걸음 떨어져 걷던 손자는 그 거리만큼 할아버지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등을 오래도록 쓸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조 씨는 지폐를 다시 한 장씩 접어 저금통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버스 회사 후배인 윤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윤 씨, 요즘 저수지 종점 가는 막차가 몇 시인가? 손주랑 갈 데가 생겼네.”
손주를 돌보는 일에는 값이 매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 기억합니다. 매일 기다려 준 교문 앞, 정류장 의자에서 건네받은 지폐 한 장의 온기를 아이는 말없이 마음에 쌓아 둡니다.
아이가 커 가며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사춘기의 거리는 마음이 멀어진 거리가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거리입니다. 묵묵히 그 뒤를 지켜 주면, 아이는 언젠가 그 거리를 스스로 걸어 돌아옵니다.
올가을 조 씨는 아내와 함께 옛 노선 버스를 타고 저수지 종점에 다녀왔습니다. 손자와 함께 갈 길을 미리 밟아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종점 정류장 옆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저수지 위로 저녁 햇살이 잔잔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조 씨는 정류장 의자에 앉아 다음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그 길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