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5 12:03

“아버지 간병비 7000만원 댔는데..” 유산 정리하던 날 등기부 앞에서 알게 된 비밀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 사이의 거리가 드러납니다. 누군가는 병원 침대 곁을 지키고, 누군가는 바쁘다는 말로 전화 한 통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떠난 뒤, 남은 재산 앞에서 그 거리는 한 번 더 드러납니다.

충청도 작은 읍내에 사는 한 씨는 올해 쉰여덟입니다. 읍내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원으로 일한 지 19년째입니다. 새벽 여섯 시 반이면 급식실 불을 켜고 커다란 솥에 국을 끓여 수백 명분의 점심을 짓습니다. 남편은 읍내에서 작은 농기계 수리점을 하고, 두 아들은 모두 객지에서 직장을 다닙니다.

한 씨는 삼 남매의 셋째 딸입니다. 큰오빠는 수도권에서 건축 자재 가게를 하고, 둘째 언니는 이웃 도시에 삽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로 친정아버지는 읍내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고향 마을 기와집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장남이 먼저였습니다. 30년 전 큰오빠가 가게를 차린다고 하자 논 두 마지기를 팔아 밑천을 대 주었습니다. “장남이 서야 집안이 선다.” 아버지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그래도 한 씨가 시집가던 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금가락지를 손에 쥐여 주며 말했습니다. “네 엄마가 막내 주라더라.” 한 씨는 그 가락지를 지금도 장롱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6년 전 봄, 아버지가 장날 읍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해가 지도록 집에 오지 않아 한 씨가 파출소까지 뛰어갔고,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삼 남매가 모였습니다.

“가게가 요즘 너무 어려워서 내가 당장은 힘들다.” 큰오빠가 먼저 말했습니다. 둘째 언니도 아이들 학원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한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사니까 모실게요. 대신 형편 되는 대로 조금씩만 보태 줘요.” 큰오빠는 “그래, 다음 달부터 꼭 보내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돈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한 씨는 급식실 월급으로 낮 시간 요양보호사 비용을 댔고, 아들 결혼 자금으로 붓던 적금을 깼습니다. 증세가 깊어진 마지막 2년은 요양병원에 매달 200만 원 가까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수리점 수입을 보태며 “장인어른 일인데 따질 게 뭐 있소” 하고 웃었습니다. 6년 동안 들어간 돈이 7,000만 원이었습니다.

큰오빠는 명절에만 홍삼 상자를 들고 다녀갔습니다. 둘째 언니는 가끔 전화로 “고생이 많다”는 말만 했습니다. 한 씨는 급식실에서 무거운 국통을 들다 허리를 다쳐도 퇴근하면 곧장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밤마다 간병 수첩에 아버지의 하루를 적는 것이 한 씨의 마지막 일과였습니다.

아버지는 올여름 요양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11월 초, 삼 남매는 유산을 정리하려고 텅 빈 기와집 안방에 모였습니다. 아침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아버지가 쓰던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낡은 통장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남은 돈은 1,200만 원이었습니다.

큰오빠가 서류 봉투를 꺼냈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집은 장남 주신다고 했다. 이미 내 앞으로 해 놨으니 그렇게 알아.” 봉투 안에는 아버지 도장이 찍힌 증여 계약서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 씨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오빠, 그럼 간병비는요? 6년 동안 7,000만 원이 들었어요.” 큰올케가 먼저 끼어들었습니다. “아가씨, 딸이 아버지 모신 걸 어떻게 돈으로 따져요.” 둘째 언니도 거들었습니다. “통장에 남은 거 셋이 나누면 되잖아.”

한 씨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서류 두 장을 꺼냈습니다. 며칠 전 떼어 온 집의 등기부와 아버지의 진단서였습니다. 한 씨는 등기부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증여로 오빠 이름이 올라간 날짜예요. 아버지가 치매 진단받고 딱 넉 달 뒤예요. 그날 기억나요, 오빠? 아버지 모시고 바람 쐬러 간다던 날이요.”

한 씨는 간병 수첩을 펼쳐 그날의 기록을 읽었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나를 보고 ‘아주머니는 뉘시오’ 하심. 오늘 어디 다녀왔는지 기억 못 하심.”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큰올케가 당황한 듯 말했습니다. “그날은 아버님이 기분이 좋으셔서 도장도 직접 꺼내 주셨어요.” 그 말에 둘째 언니가 얼굴을 붉혔습니다. “오빠, 그 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고 했잖아.” 한 씨가 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언니도 알았어?” 둘째 언니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오빠가 나중에 집 팔면 천만 원 준다고 해서….”

한 씨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큰오빠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를 모시고 가 도장을 받아 냈고, 큰올케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둘째 언니는 돈을 약속받고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6년 동안 혼자 병원을 오간 사람만 그 일을 몰랐습니다.

한 씨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 욕심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주셨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법률 상담에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모든 서명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판단 능력이 없었다면 증여의 효력을 다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오래 모신 자식의 몫을 따로 인정받는 길도 있다고 했습니다.

“집을 아버지 앞으로 되돌려서 법대로 나눠요. 간병비부터 정산하고요. 안 되면 저도 법에 물을 수밖에 없어요.”

보름 뒤 큰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집을 팔아 간병비를 먼저 갚고 나머지는 법대로 나누겠다고 했습니다. 끝내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한 씨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수첩을 쓰다듬었습니다.

희곡 『리어 왕』에서 늙은 왕은 달콤한 말을 하는 두 딸에게 나라를 나눠 주고, 꾸밈없이 진심을 말한 막내딸을 내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버지 곁에 돌아온 사람은 그 막내딸이었습니다.

부모를 모신 세월은 말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습니다. 억울한 일 앞에서 큰소리보다 차분히 모아 둔 서류 한 장이 더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가족의 일이라고 해서 덮어 두는 것만이 정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 주세요.

늦가을, 한 씨는 어머니의 금가락지를 끼고 아버지 산소를 찾았습니다. 봉분 옆에는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한 씨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막걸리를 한 잔 따르고 오래 앉아 있다가,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갈 무렵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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