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 가운데 누군가는 곁을 지켜야 합니다. 그 몫은 대개 가장 가까이 사는 자식, 가장 거절하지 못하는 자식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부모가 떠난 뒤, 그 세월은 서류 몇 장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도 합니다.
경기도 변두리 도시에 사는 박 씨는 올해 쉰일곱입니다. 스물다섯 살부터 입시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서른 해 가까이 칠판 앞에 섰습니다. 회사원인 남편과 군 복무를 마친 대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위로 언니가 하나 있었지만 열다섯 해 전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래로 네 살 터울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박 씨의 어머니는 시장 골목에서 서른 해 동안 국숫집을 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멸치 육수를 올렸고, 손님이 남긴 국물까지 아까워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장 뒤편에 작은 이층집 한 채를 마련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늘 막내아들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도시락 반찬에 계란말이가 들어가는 건 남동생뿐이었고, 박 씨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습니다. 남동생이 마흔 넘어 차린 식당이 두 번 문을 닫았을 때도 어머니는 국숫집 금고를 털어 빚을 막아 주었습니다.
그래도 박 씨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학원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국숫집에 들러 설거지를 거들었고, 어머니는 말없이 박 씨 그릇에만 고명을 수북이 얹어 주었습니다. 그게 어머니 나름의 표현이라는 걸 박 씨는 알고 있었습니다.
여섯 해 전 3월, 어머니가 혼자 국숫집 가스 불을 켜 둔 채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박 씨는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혼자 두면 안 된대. 너도 같이 좀 하자.”
남동생은 한숨부터 쉬었습니다. “누나, 나 지금 가게 자리 알아보느라 정신없어. 누나는 학원 강사니까 시간 조절이 되잖아. 돈 들어가는 건 나중에 내가 다 챙길게.” 박 씨는 그달 말 학원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 뒤 여섯 해는 길었습니다. 어머니는 밤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고, 박 씨는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문소리에 귀를 세웠습니다. 주간보호센터 비용과 밤 간병인 품삯, 병원비와 기저귀 값은 박 씨의 퇴직금과 적금에서 나갔습니다. 박 씨는 영수증을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가계부에 붙여 두었는데, 여섯 해 동안 들어간 돈이 7000만원이었습니다.
남동생은 명절에만 과일 상자를 들고 왔다가 한 시간을 넘기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열한 번 했지만 병원에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박 씨를 보면 “국숫집 아줌마”라고 불렀고, 남동생 이름만은 끝까지 또렷하게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올여름 끝자락, 박 씨의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남동생은 조문객 앞에서 가장 크게 울었습니다.
석 달 뒤인 11월 초,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두 남매는 시장 건너편 상가 2층의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어머니 명의의 이층집, 시세로 3억 원쯤 하는 그 집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 씨는 가방에 가계부를 넣어 갔습니다. 집을 팔아 반씩 나누되, 간병에 들어간 돈은 먼저 따져 보자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형광등이 깜박이는 사무실에서 직원이 녹차를 종이컵에 따라 주었습니다.
박 씨가 가계부를 꺼내기도 전에 남동생이 누런 서류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누나, 이건 엄마 뜻이야. 공증까지 받은 거고.” 봉투 안에는 공정증서 유언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명의의 집을 전부 아들에게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박 씨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습니다. 그러다 맨 아래 작성 날짜에서 눈이 멈췄습니다. 여섯 해 전 3월 셋째 주.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은 지 열흘 뒤였고, 박 씨가 학원에 사표를 쓴 바로 그 달이었습니다.
그제야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막내가 나 데리고 짜장면 먹으러 갔다, 도장도 찍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 씨는 그때 병 때문에 하는 말이려니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너, 엄마 진단받고 열흘 만에 이걸 받으러 갔니?” 박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남동생은 눈을 피했습니다. “엄마가 그때는 정신이 멀쩡했어. 공증인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고.”
법무사가 서류를 넘기다 무심코 덧붙였습니다. “아드님이 은행 대출 날짜가 잡혀 있다고 등기 이전을 서둘러 달라고 하셔서요. 담보 상담은 이미 다 받아 두셨더라고요.” 남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여섯 해 동안 병원 복도 한 번 밟지 않은 동생은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그 집을 담보로 돈 빌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 씨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복도 끝 창가에서 박 씨는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밤길을 쫓아다니던 새벽들과 기저귀를 갈며 삼킨 눈물, 칠판 앞에 다시 서지 못한 세월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창밖으로는 비에 젖은 시장 골목이 내려다보였고, 어머니의 국숫집 자리에는 휴대전화 가게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박 씨는 눈물을 닦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나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갈게.” 남편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옆에 있을게.”
다음 주 박 씨는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는 유언이 있어도 자녀에게는 법정 상속분의 절반을 돌려받을 권리, 곧 유류분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상속이 시작되고 그런 유언이 있다는 걸 안 날부터 1년 안에 청구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박 씨는 그 자리에서 유류분 반환 소송을 맡겼습니다.
남동생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누나, 핏줄끼리 소송이 말이 돼? 엄마가 하늘에서 보면 뭐라 하겠어.” 박 씨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보셨다면, 6년 동안 병원에 한 번도 안 온 아들부터 찾으셨겠지.” 그리고 휴대전화에서 남동생의 번호를 지웠습니다.
간병은 사랑으로 하는 일이지만, 그 시간과 돈까지 사랑이라는 말로 덮어 두면 남는 사람만 다치게 됩니다.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를 떠맡게 되었다면 처음부터 비용을 기록하고, 형제들과 나눌 몫을 글로 남겨 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가 아프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부모를 따로 모시고 다니는 자식이 있다면 한 번쯤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정은 정대로 지키되, 지켜야 할 권리는 끝까지 지키는 것이 떠난 부모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습니다.
첫눈이 내린 아침, 박 씨는 거실 한쪽에 작은 칠판을 걸고 동네 중학생 셋을 앉혔습니다. 여섯 해 만에 분필을 쥔 손이 조금 떨렸지만, 창밖 마당의 감나무에는 까치밥 몇 알이 붉게 남아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