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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는 장바구니부터 챙깁니다. 자식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떠올리며 시장을 몇 바퀴씩 돌고, 허리가 아파도 전 부치는 손을 멈추지 않습니다. 상 앞에 둘러앉을 얼굴들을 생각하면 그 고생이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청도 내륙의 한 읍내에 사는 오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남편과 함께 장터 골목에서 32년 동안 떡방앗간을 했습니다. 명절 대목이면 사흘씩 잠을 못 자고 시루를 올렸습니다. 5년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방앗간을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연금에 장터 국숫집 주방 일을 거들고 받는 품삯을 보태 혼자 지냅니다.
오 씨에게는 4남매가 있습니다. 큰아들과 큰딸, 작은아들, 막내딸 모두 결혼해 수도권에 삽니다. 넉넉하지 않은 방앗간 살림이었지만 부부는 네 아이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등록금 철이면 남편은 떡 배달을 하루 두 번씩 더 뛰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추석이면 방앗간 안방은 송편 빚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큰아들은 깨 송편만 골라 먹었고, 막내딸은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 낳는다는 말에 혀를 내밀고 반달 모양을 다듬었습니다. 오 씨는 아이들 손에 반죽을 떼어 주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추석, 차례를 마치고 툇마루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없으면 애들이 명절에 모일 데가 없을 거요. 당신이라도 오래 상을 차려 주시오.” 그 말은 남편의 마지막 부탁처럼 오 씨 가슴에 남았습니다.
남편이 떠난 첫해 추석에는 4남매가 모두 내려와 하룻밤을 자고 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얼굴 보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차례 시간에 맞춰 왔다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일어서는 자식이 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네 집이 모두 모인 시간이 세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오 씨는 서운했지만 “다들 사는 게 바쁘니까” 하며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 주었습니다.
올해도 오 씨는 한 달 전부터 추석을 준비했습니다. 국숫집 품삯에서 매달 조금씩 떼어 쌀독 옆 봉투에 모아 둔 돈이 80만 원이었습니다. 오 씨는 가족 단체 대화방에 글을 남겼습니다. “올 추석엔 다들 오지? 이번엔 손주들이랑 송편도 같이 빚자.” 큰아들이 먼저 답했습니다. “그럼요, 엄마. 가야죠.” 나머지 셋도 엄지 그림을 하나씩 보냈습니다.
오 씨는 그 답에 힘을 얻어 장터를 돌았습니다. 제수용 조기와 사과, 배를 사고, 큰아들이 좋아하는 동그랑땡 재료와 막내딸이 좋아하는 녹두를 넉넉히 샀습니다. 손주 여덟 명 몫까지 셈하니 80만 원이 금세 바닥났습니다. 이웃 한 씨가 장바구니를 보고 혀를 찼습니다. “형님, 혼자 그걸 다 하시게요?” 오 씨는 웃었습니다. “애들 오면 다 먹어.”
추석 사흘 전부터 오 씨는 부엌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첫날은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쳤고, 둘째 날은 동그랑땡과 꼬치전, 동태전을 부쳤습니다. 셋째 날은 쌀가루를 익반죽해 송편 이백 개를 빚었습니다. 방앗간 시절 손끝은 그대로였지만, 무릎은 예전 같지 않아 일어설 때마다 벽을 짚어야 했습니다.
추석 아침, 하늘은 맑았고 마당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가 붉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오 씨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남편 영정 앞에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조기를 올리고, 밤을 치고, 솔잎 깔고 쪄 낸 송편을 접시마다 소복하게 쌓았습니다. 상 옆에는 자식들이 앉을 방석 네 개와 손주들 방석까지 나란히 깔아 두었습니다.
아침 여덟 시가 넘자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큰아들이었습니다. “엄마, 회사 일이 생겨서 이번엔 못 가요. 죄송해요.” 곧이어 큰딸의 문자가 왔습니다. “엄마,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이번엔 못 가. 미안해.” 작은아들은 아이가 열이 난다고 했고, 막내딸은 사위가 갑자기 출장을 간다고 했습니다. 문자 네 통이 오는 데 삼십 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 씨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참 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김을 내던 송편이 식고, 고소하던 전이 기름에 굳어 갔습니다. 오 씨는 혼자 술잔을 올리고 절을 했습니다. “여보, 애들이 다 바쁘다네요. 올해는 나 혼자예요.”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데 빈 방석 네 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날 저녁, 오 씨는 손주들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막내딸의 SNS를 열었습니다. 공항 출국장에서 캐리어를 끌고 활짝 웃는 막내딸네 식구 사진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출장 간다던 사위도 그 옆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의 SNS에는 처가 식구들과 캠핑장에서 고기를 굽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오 씨는 다리가 풀려 방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밤 아홉 시쯤, 가족 대화방에 막내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들 엄마한테 잘 둘러댔지? 한 달 전에 말 맞춘 대로 했으니 괜찮을 거야.” 글은 1분도 안 돼 지워졌지만, 오 씨는 이미 읽은 뒤였습니다. 형제들끼리 쓰는 방에 보내려던 글을 엄마가 있는 방에 잘못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럼요, 엄마”라고 답하던 그 무렵, 자식들은 이미 각자 둘러댈 핑계를 정해 두었던 것입니다.
오 씨는 식은 전과 송편을 쟁반 세 개에 나눠 담아 보자기에 싸 들고 마을 경로당으로 갔습니다. 명절에도 갈 데 없는 어르신 몇 분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 씨가 놀라 일어섰습니다. “형님, 애들 안 왔어요?” 오 씨는 “다들 바쁘대” 하고 쟁반을 내려놓았습니다. 어르신들은 송편 맛이 방앗간 시절 그대로라며 맛있게 드셨습니다.
집에 돌아온 오 씨는 불도 켜지 않은 부엌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자식들이 오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될 일을 넷이 한 달 동안 말을 맞춰 가며 감췄다는 것이 더 아팠습니다. 자식들 눈에 엄마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달래고 피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오 씨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남편의 부탁은 자식들이 모일 자리를 지켜 달라는 것이었지, 아무도 오지 않는 상을 혼자 지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밝자 오 씨는 가족 대화방에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막내가 어젯밤 올린 글 엄마도 봤다. 너희를 탓하지는 않으마. 다만 앞으로는 둘러대지 마라. 내년부터 아버지 차례는 절에 올리기로 했다. 명절엔 엄마도 여행 간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라. 그때는 엄마가 밥 해 줄게.”
글을 올리자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습니다. 큰딸은 전화기 너머로 울었습니다. “엄마, 미안해. 다들 지쳐서 그랬어. 말하면 엄마가 서운해하실까 봐.” 오 씨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서운한 건 너희가 안 와서가 아니다.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서다.” 큰아들이 내년엔 꼭 가겠다고 했지만, 오 씨는 “이미 정했다”는 말만 남겼습니다.
며칠 뒤 오 씨는 읍내에서 버스로 삼십 분 거리의 절을 찾아가 내년 설과 추석 차례를 부탁했습니다. 경로당 어르신들의 바닷가 여행 모임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 씨가 손뼉을 쳤습니다. “형님, 진작 그러시지. 이제 우리도 명절에 놀러 다녀요.”
자식에게 명절은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길은 막히고, 양가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아이들 챙기기에 지칩니다. 그 사정은 부모도 압니다. 그러나 사정을 감추고 핑계를 맞추는 순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에는 음식보다 거짓말이 먼저 오릅니다.
부모도 자식을 기다리는 일에 마음을 다 걸지 않아도 됩니다. 기다림을 내려놓고 내 몫의 명절을 찾는 것이 오히려 정을 오래 지키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못 간다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집이 오래갑니다.
늦가을, 오 씨는 그 절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대웅전 앞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소복이 떨구었고, 처마 끝 풍경이 바람에 맑게 울렸습니다. 오 씨는 남편 이름을 적은 등 하나를 달고, 은행잎 깔린 돌계단을 한 칸씩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