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6 11:08

“2층 세입자 월세 40만원 안 올렸는데..” 재개발 이주 설명회에서 드러난 세입자 부부의 민낯

집 한 채를 세놓고 사는 사람에게 세입자는 한 지붕 아래 식구나 다름없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세입자에게 월세를 덜 받는 것을 손해가 아니라 인심이라고 여기는 집주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베푼 정이 엉뚱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황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경상도 바닷가 도시의 오래된 언덕 동네에서 삼층짜리 다가구주택 1층에 살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수산시장 골목에서 35년 동안 건어물 가게를 했습니다. 새벽마다 멸치 상자를 지고 나르며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아내는 4년 전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은 수도권에서 회사를 다닙니다.

8년 전 봄, 2층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남편 정 씨는 오토바이 배달 일을 했고, 정 씨 아내 품에는 돌도 안 지난 아기가 안겨 있었습니다. 계약하던 날 정 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사장님, 보증금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월세를 조금만 깎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황 씨는 아기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다 말했습니다. “40만 원만 내게. 대신 애 잘 키우고.”

그해 겨울, 밤 열한 시가 넘어 1층 현관문이 쾅쾅 울렸습니다. 아기가 열이 펄펄 끓는데 보일러가 멈췄다는 것이었습니다. 황 씨는 쓰던 전기장판을 둘둘 말아 올려 보내고, 이튿날 아침 기사를 불러 보일러를 새로 들였습니다. 황 씨 아내는 미역국 한 냄비를 끓여 계단을 올랐습니다. “아기 엄마, 엄마가 몸 축나면 안 돼요.”

아기 돌날에는 황 씨 부부가 금반지 한 돈을 사 들고 2층에 올라갔습니다. 정 씨는 고개를 몇 번이고 숙였습니다. “사장님 내외분은 저희한테 부모님 같은 분들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황 씨는 월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동네 시세는 두 배가 되어 같은 크기 집이 80만 원을 받았습니다. 동네 부동산 사장이 “어르신, 그 집을 반값에 주고 계십니다” 하고 혀를 차도 황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애 키우는 집에서 그 돈 더 받아 뭐 하노.”

5년쯤 전부터는 정 씨 식구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월세는 매달 20일이면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왔습니다. 계단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작업복 차림의 낯선 청년이었습니다. 정 씨에게 물으니 “제 사촌 동생입니다. 저희가 맞벌이라 밤에 애를 봐 주러 와 있습니다” 했습니다. 황 씨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황 씨는 해마다 김장을 했습니다. 아내가 적어 둔 공책을 펴 놓고, 손을 벌겋게 물들여 가며 배추 스무 포기를 버무렸습니다. 한 통은 아들네로 부치고, 한 통은 꼭 2층 문 앞에 놓았습니다. 겨울이면 귤 한 상자도 주문해 함께 올려 두었습니다. 상자 위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쪽지를 붙였습니다. “2층 아기 먹이게.”

3년 전 겨울에는 정 씨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사장님, 보일러가 또 고장 나서 애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황 씨는 그날로 보일러를 다시 갈아 주었습니다. 다만 마음 한쪽이 서운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문자 한 줄이 전부였고, 언제부턴가 명절에도 아이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올가을 동네에 재개발 조합이 섰습니다. 이주를 앞두고 조합은 주민들을 모아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시월 끝자락, 동네 예식장 2층 홀에 접이식 의자 백여 개가 놓였습니다. 앞쪽 스크린에는 이주 일정표가 떠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두툼한 안내 책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황 씨는 젖은 우산을 발치에 세워 두고 가운데쯤 자리를 잡았습니다.

질의응답 순서가 되자 앞줄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정 씨였습니다. 정 씨는 마이크를 받아 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저는 언덕길 삼층집 2층에서 8년을 살았습니다. 집주인이 수리를 안 해 줘서 겨울마다 보일러가 얼고 벽에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애가 그 집에서 병치레를 달고 살았어요. 이런 세입자한테는 이주비를 더 쳐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홀 안이 술렁였습니다.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황 씨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황 씨는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입을 열려 했지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릎 위에 올린 안내 책자만 손안에서 구겨졌습니다.

그때 맨 뒷자리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작업복 위에 점퍼를 걸친 청년 하나가 쭈뼛쭈뼛 일어섰습니다. 계단에서 몇 번 마주쳤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저 그 집 2층에 사는데요. 저는 이분께 월세 75만 원 내고 있습니다.”

청년은 정 씨를 가리켰습니다. 홀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빗소리만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청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5년 전에 이 아저씨가 집주인 조카라면서 방을 내줬어요. 할아버지 귀가 어두우시니 말 걸지 말라고 했고요. 수리를 안 해 줬다니요. 3년 전에 보일러 고장 났다고 아저씨한테 말했더니 바로 다음 날 새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문 앞에 귤 상자랑 김장김치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도 다 제가 먹었습니다. 쪽지에 아기 먹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정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마이크를 쥔 손이 허공에서 멈췄습니다. 주민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얼어붙었습니다. 조합 직원이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습니다. “지금 실제로 사시는 주소가 어디십니까?” 정 씨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정 씨 부부는 5년 전 다른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가 놓고 그 사실을 황 씨에게 숨겼습니다. 황 씨에게는 40만 원을 보내면서 청년에게는 75만 원을 받아, 매달 35만 원씩 차익을 챙겨 온 것입니다. 5년이면 2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황 씨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습니다. 귤 상자를 고르던 일, 아내의 공책을 펴 놓고 김치를 버무리던 겨울밤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설명회가 끝나자 청년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할아버지, 김치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인사 한 번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황 씨는 청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자네 잘못이 아니네. 그 김치, 자네라도 먹었으니 됐다.”

며칠 뒤 정 씨가 1층 문을 두드렸습니다. 황 씨는 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나는 35만 원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닐세. 자네 아기 얼굴 보며 놓은 보일러였고, 자네 식구 먹으라고 버무린 김치였네.”

황 씨는 집주인 동의 없이 남에게 다시 세를 놓는 것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사유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 씨와의 계약을 정리했습니다. 청년이 정 씨에게 맡긴 보증금도 돌려받게 했습니다. 이주비 문제는 조합이 실제 거주 여부를 따져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주 날짜가 잡힐 때까지 청년은 황 씨에게 직접 월세를 내기로 했습니다. 황 씨가 정한 금액은 40만 원이었습니다. 청년이 “그건 너무 적습니다” 하자 황 씨가 웃었습니다. “이 집 2층은 원래 40만 원이었네.”

인심은 베풀수록 아름답지만, 그 인심이 누구에게 닿고 있는지는 가끔 확인해야 합니다. 세를 놓았다면 1년에 한 번쯤은 직접 문을 두드려 인사를 나누세요. 계약서 속 사람과 실제로 사는 사람이 같은지 살피는 일은 의심이 아니라 정을 지키는 일입니다.

다만 베푼 마음은 엉뚱한 손에 들어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황 씨의 귤과 김치는 결국 추운 방에서 홀로 버티던 한 청년의 겨울을 데웠습니다.

올겨울 첫 추위가 온 날, 황 씨는 청년과 함께 마당에서 배추 스무 포기를 버무렸습니다. 김장을 마친 저녁, 두 사람은 언덕 아래 방파제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갔습니다. 바다 위로 해가 붉게 기울었고, 갈매기 몇 마리가 등대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황 씨는 김칫국물 밴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해가 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OWN 뉴스

당신의 뉴스를 담습니다. 오늘의 건강부터 내일의 노후까지, 꼭 필요한 생활 정보를 전합니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