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5 04:11

“2층 세입자 월세 50만원 묶어 줬는데..” 대학생이 내민 영수증 앞에서 드러난 세입자의 민낯

집을 세놓고 사는 사람에게 좋은 세입자는 돈보다 귀합니다. 제때 월세를 내고 집을 내 집처럼 아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주인은 몇만 원쯤 덜 받아도 남는 장사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 인심이 엉뚱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최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경상도 바닷가 소도시의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 31년째 세탁소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간 남편과 둘이 모은 돈으로 2층짜리 상가주택을 장만했습니다. 1층에는 세탁소를 차리고 가게 뒤 작은 방에서 살림을 했으며, 방 셋짜리 2층 살림집은 세를 놓았습니다.

남편은 10년 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수도권에서 직장을 다니고, 딸은 시집가서 아이 둘을 키웁니다. 자식들은 이제 그만 쉬라고 했지만 최 씨는 아침 일곱 시면 어김없이 보일러를 켜고 다리미에 김을 올렸습니다. 손님이 맡긴 와이셔츠 깃을 빳빳하게 세우는 일이 최 씨에게는 하루를 사는 이유였습니다.

8년 전 봄, 2층에 마흔 중반의 윤 씨 부부가 들어왔습니다. 계약하던 날 윤 씨는 최 씨의 손을 붙잡고 눈물부터 보였습니다.

“사장님, 남편이 공사장에서 허리를 크게 다쳐서 일을 못 해요. 제가 식당 일 나가서 버는 걸로 버텨야 하는데, 월세만 좀 사정 봐주시면 은혜 안 잊을게요.”

그때 주변 시세는 70만 원 가까이 했습니다. 남편을 병으로 보낸 최 씨에게 아픈 사람 이야기는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50만 원만 내요. 사정 나아질 때까지는 안 올릴게.” 그 말 한마디가 8년이 될 줄은 최 씨도 몰랐습니다.

윤 씨는 최 씨를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최 씨가 독감으로 가게 문을 사흘 닫았을 때는 호박죽을 쑤어 방문 앞에 두고 갔습니다. 최 씨는 그 고마움을 세탁으로 갚았습니다. 설과 추석이면 윤 씨네 겨울 외투와 남편 양복, 이불 홑청까지 받아다 빨아 주고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드라이클리닝 값만 따져도 명절마다 10만 원은 족히 넘었습니다.

2층에 젊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건 이사 온 지 몇 달 뒤였습니다. 계단에서 마주친 앳된 얼굴을 보고 최 씨가 묻자 윤 씨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골 조카들이에요. 이 근처 대학 다니는데 방값 아끼라고 데리고 있어요.” 2층은 바깥 철계단으로 따로 오르내리는 구조라 최 씨는 그 말을 의심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카들은 해마다 얼굴이 바뀌었지만 학생들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사이 세탁소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동네에 무인 빨래방이 두 곳이나 생기면서 손님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올여름에는 30년 가까이 쓴 드라이클리닝 기계마저 멈춰 섰습니다. 새 기계를 들이는 데 900만 원 가까이 들어, 최 씨는 적금을 깨고도 모자라 딸에게 손을 벌려야 했습니다. 재산세와 건물 보험료도 해마다 올랐습니다.

지난 10월 초, 최 씨는 며칠을 망설이다 2층 계단을 올랐습니다. “동생, 미안해서 어쩌나. 다음 달부터 5만 원만 더 받으면 안 될까. 기계 바꾸느라 빚이 생겨서 그래.” 윤 씨는 대답 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날 밤, 상인과 주민 수십 명이 들어 있는 동네 단톡방에 긴 글이 올라왔습니다. “8년 동안 아픈 남편 데리고 이를 악물고 살았는데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겠답니다. 세입자 피를 빨아서 기계를 바꾼답니다.” 글 곳곳에는 ‘악덕 집주인’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붙어 있었습니다.

단톡방은 금세 들끓었습니다. “세탁소 아주머니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 “아픈 사람한테 너무하다.” 최 씨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손을 떨었습니다. 30년 동안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이웃들이 한순간에 남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틀 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이었습니다. 세탁소 차양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비닐을 씌운 양복들이 줄줄이 걸린 가게 안에서는 다리미 김이 뿌옇게 피어올랐습니다. 맞은편에서 정육점을 하는 오 씨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최 씨, 5만 원이 큰돈은 아니래도 아픈 집에 그러는 건 아니지. 우리 동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각박했어?”

윤 씨는 그 옆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형님, 8년을 형님 형님 하며 살았는데 이러실 수 있어요? 우리 그이는 아직도 허리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요.” 몇몇 이웃이 혀를 찼습니다. 최 씨는 다리미를 내려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 2층 철계단에서 배낭을 멘 대학생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소란을 보고 걸음을 멈춘 학생은 한참 사람들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이 아주머니한테 월세 30만 원 내는데요.”

순간 세탁소 앞이 조용해졌습니다. 학생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내밀었습니다. 매달 25일마다 30만 원씩 보낸 이체 내역이 줄지어 있었고, 받는 사람 칸에는 윤 씨의 이름이 찍혀 있었습니다. “옆방 형도 똑같이 내요. 주인 할머니가 까다로운 분이라 알면 쫓겨나니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학생은 사람들 표정을 살피다 한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매일 새벽에 물류센터 일 나가시잖아요. 시험 기간에 밤새우면 네 시 반쯤 나가시는 소리가 들려요. 허리 아프시다는 건 처음 들어요.”

오 씨가 들고 있던 우산이 기우뚱했습니다. 윤 씨 편을 들던 이웃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윤 씨는 “조카들이 용돈 삼아 보태 주는 거”라고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저 아주머니 조카 아닌데요” 하자 그대로 철계단을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날 밤 최 씨는 가게 뒷방에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방 두 개에서 매달 60만 원이 들어오고, 최 씨에게는 50만 원이 나갔습니다. 윤 씨 부부는 8년 동안 방값 한 푼 내지 않고 살면서 다달이 10만 원씩 남겨 온 셈이었습니다. 명절마다 공짜로 빨아 준 양복은 아프다던 남편이 새벽마다 멀쩡히 입고 나가던 옷이었습니다.

최 씨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시내 법무사 사무실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습니다. 집주인 동의 없이 방을 다시 세놓는 것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최 씨는 윤 씨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계약이 끝나는 내년 봄까지 집을 비워 달라고 알렸습니다.

대학생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최 씨를 찾아왔습니다. 최 씨는 학생들의 젖은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죄가 있니. 이제부터는 나랑 직접 계약하자. 방값은 25만 원만 내.” 학생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습니다.

며칠 뒤 단톡방에 오 씨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한쪽 말만 듣고 최 씨한테 손가락질했습니다. 30년 이웃한테 부끄럽습니다.” 그 아래로 사과하는 말들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윤 씨가 올렸던 글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습니다.

인심은 쌓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받는 사람이 그 인심을 어떻게 쓰는지 한 번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 앞에서 지갑을 여는 마음은 귀합니다. 다만 그 마음을 지키려면 가끔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손가락질을 받을 때 한쪽 말만 듣고 돌을 들지는 마세요. 30년을 보아 온 얼굴과 단톡방의 글 한 줄 가운데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1월 첫 추위가 찾아온 아침, 최 씨는 올여름 들여놓은 새 기계에 학생들이 맡긴 겨울 점퍼 두 벌을 넣었습니다. 학생들은 괜찮다는 최 씨를 마다하고 기어이 세탁비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갔습니다. 유리문 너머로 시장 골목 맞은편 정육점의 셔터가 올라가고, 오 씨가 머쓱하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다리미에서 피어오른 하얀 김이 가게 유리창을 천천히 덮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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