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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 사이의 경조사는 계산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쁜 날 함께 웃고 슬픈 날 곁을 지키는 것이 우정이라고 다들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힘든 날, 그 믿음이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
경기도 변두리 도시에 사는 한 씨는 올해 예순다섯입니다. 스물넷에 결혼한 뒤로 평생 살림만 해 온 주부입니다. 남편은 시장 입구에서 28년 동안 작은 인쇄소를 했고, 아들과 딸은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렸습니다. 한 씨는 여고 동창회에서 30년째 총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한 씨 곁에는 여고 시절부터 붙어 다닌 동창 오 씨가 있었습니다. 둘은 교복 차림으로 매점 빵 하나를 나눠 먹던 사이였습니다. 오 씨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씨는 젖먹이 아들을 업고 사흘 내내 빈소에서 음식을 날랐습니다. 12년 뒤 오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사흘 동안 상복 다림질부터 조문객 신발 정리까지 도맡았습니다.
오 씨의 두 아들이 장가를 갈 때도 한 씨는 축의금 접수대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8년 전, 오 씨가 칼국수 가게를 열 때는 개업 전날까지 사흘 동안 주방 벽 타일을 닦고 그릇을 날랐습니다.
그 무렵 오 씨가 한 씨를 붙잡았습니다. “보증금이 1000만원 모자라. 너밖에 부탁할 데가 없다.” 한 씨는 장 보는 돈을 아껴 몰래 붓던 적금을 깨서 내주었습니다. 그 돈은 3년 뒤에야 말 한마디 없이 통장에 들어왔습니다. 한 씨는 돌려받은 게 어디냐며 서운함을 접었습니다.
한 씨에게는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결혼하던 해부터 써 온 부조 장부였습니다. 오 씨 이름 옆에는 부모상 두 번, 혼사 두 번, 개업 축하까지 금액과 날짜가 빼곡했습니다. 한 번도 빠뜨리지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형편이 기운 것은 5년 전이었습니다. 인쇄 일감이 끊기면서 남편은 가게를 접었고, 이듬해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씨는 병원과 집을 오가느라 동창 모임에도 겨우 얼굴만 내밀었습니다.
그해 송년 모임에서 오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총무님, 요즘 회비 걷기도 버겁지? 남편 병원비 대려면.” 몇몇이 따라 웃었습니다. 한 씨는 농담이겠거니 하고 잔을 내려놓았지만, 집에 오는 버스에서 내내 창밖만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올가을, 남편이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시월의 토요일이었습니다. 한 씨는 빈소 한쪽에 앉아 동창회 단체 대화방에 부고를 올렸습니다. 30년 동안 남의 부고를 올리던 손으로 처음 올리는 제 남편의 부고였습니다.
동창 몇이 다녀갔지만 오 씨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녁 7시쯤 휴대전화에 알림이 울렸습니다. 오 씨 이름으로 5만원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메모란에는 ‘못 가서 미안. 일이 있어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한 씨는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았습니다. 두 번의 빈소에서 보낸 엿새, 접수대에 서 있던 두 번의 혼삿날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사정이 있겠지, 하고 휴대전화를 덮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조문객이 뜸해졌을 때, 딸이 머뭇거리며 휴대전화를 내밀었습니다. “엄마,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화면에는 오 씨가 올린 사진이 떠 있었습니다. 풍선으로 꾸민 연회장,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기, 그 옆에서 활짝 웃는 오 씨. ‘동창네 손주 돌잔치, 축하해!’ 사진이 올라온 시각은 저녁 7시 12분이었습니다. 5만원이 들어온 바로 그 시각이었습니다.
돌잔치를 연 동창은 그 도시에서 큰 병원을 하는 집 안주인이었습니다. 한 씨는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딸이 엄마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엄마, 괜찮아요?” 한 씨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이 차가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동창 윤 씨가 조문을 왔습니다. 절을 마친 윤 씨는 한 씨 옆에 앉아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너한테 이 말을 해야 하나 몇 년을 고민했어. 오 씨 말이야, 우리한테 그러더라. 형편 기운 집에는 가 봐야 득 될 게 없다고. 너희 가게 접고 나서부터 계속 그랬어.”
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모임마다 던지던 농담, 고맙다는 말 없이 들어온 보증금, 빈소 대신 돌잔치.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그제야 하나로 맞춰졌습니다.
삼우제를 마친 날 밤, 한 씨는 부조 장부를 꺼냈습니다. 오 씨 이름이 적힌 쪽을 한 장 한 장 넘겼습니다. 40년 치 날짜와 금액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한 씨는 마지막 장까지 넘긴 뒤 조용히 장부를 덮었습니다. 셈하려고 쓴 장부가 아니었으니, 이제 그만 덮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한 씨는 오 씨에게 5만원을 돌려보냈습니다. 메모란에는 ‘그동안 고마웠다. 잘 지내라’라고만 적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들고 다닌 회비 통장과 연락처 수첩을 윤 씨에게 건넸습니다.
“총무는 이제 네가 맡아 줘. 나는 여기까지 할게.” 윤 씨가 붙잡았지만 한 씨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날 저녁 한 씨는 단체 대화방에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왔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남편 가는 길에 와 준 분들 잊지 않겠습니다.’
며칠 뒤 오 씨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너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한 씨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설명해야 알 사람이라면, 설명해도 모를 사람이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나라 사람 적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높은 벼슬에 있을 때는 손님이 문 앞을 메웠지만, 벼슬에서 물러나자 문 앞에 참새 그물을 쳐도 될 만큼 발길이 끊겼습니다. 훗날 적공은 대문에 써 붙였습니다. 한 번 가난해지고 한 번 부유해져 봐야 사귐의 참모습을 안다고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잘나가는 날보다 기울어진 날 드러납니다. 오래 쌓은 정이라도 한쪽만 붓고 있었다면, 장부를 덮는 일도 나를 지키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힘든 날 말없이 와서 곁에 앉아 준 사람을 오래 기억하세요. 그 사람이 진짜 친구입니다.
올해 늦가을, 한 씨는 윤 씨와 함께 동네 뒷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떡갈나무 잎이 바스락거리며 발밑에 쌓였고, 산 아래로 남편의 인쇄소가 있던 시장 골목 지붕들이 내려다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정자에 나란히 앉아 보온병에 담아 온 보리차를 나눠 마시며 해가 질 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