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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병상에 눕고 나면 형제 사이의 셈은 소리 없이 한쪽으로 기웁니다. 누군가는 날마다 병실을 지키고, 누군가는 전화 한 통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여깁니다. 그 기울어진 셈은 대개 부모가 떠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남쪽 바닷가의 한 소도시에서 22년 동안 학원 승합차를 몰았습니다. 아침에는 유치부 아이들을, 밤에는 고등부 아이들을 태우고 하루에도 열 번 넘게 같은 길을 돌았습니다. 남편은 조선소 협력업체에서 용접 일을 하다 정년을 맞았고, 하나뿐인 딸은 결혼해 이웃 도시에 삽니다.
정 씨는 시장 골목에서 국숫집을 하던 어머니의 큰딸입니다. 열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정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국숫집에서 면을 뽑았습니다. 그 돈으로 다섯 살 아래 남동생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늘 말했습니다. “네 동생은 이 집 기둥이다. 기둥이 서야 집이 산다.”
남동생이 장가가던 날, 어머니는 장롱 깊이 넣어 두었던 금가락지와 목걸이를 올케 손에 모두 쥐여 주었습니다. 정 씨가 시집갈 때 받은 것은 은수저 한 벌이었습니다. 정 씨는 서운한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감기만 걸려도 국숫집 셔터를 대신 올린 사람은 늘 정 씨였습니다.
4년 전 봄, 여든둘이던 어머니가 국숫집 부엌에서 쓰러졌습니다. 뇌경색이었습니다. 한쪽 몸이 마비된 어머니는 집 근처 요양병원에 들어갔고, 병원비에 공동 간병비와 기저귀값까지 더해 매달 200만 원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서울에 사는 남동생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누나, 내가 지금 가게 대출에 묶여 있어서 그래. 조금만 누나가 맡아 줘. 형편 풀리면 반씩 나눠 낼게.” 정 씨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학원차 월급은 거의 그대로 병원으로 들어갔고, 모자라는 달에는 딸 결혼 자금으로 붓던 적금을 깼습니다. 남편은 퇴직금 일부를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장모님 일인데 따질 게 뭐 있소.”
정 씨는 마지막 아이를 내려 준 밤 아홉 시면 승합차를 몰고 곧장 병원으로 갔습니다. 어머니 손발을 닦고, 굳은 손가락을 하나씩 주물렀습니다. 어머니는 말을 잃은 뒤에도 성당에서 받은 나무 묵주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정 씨가 묵주알을 굴려 드리면 어머니 눈가가 조금 풀렸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반씩 내자던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은 명절마다 “누나가 있어서 든든하다”는 문자를 보냈을 뿐입니다. 지난해 정 씨는 허리 디스크로 끝내 운전대를 놓았습니다. 그 뒤로는 시장 반찬가게에서 새벽 일을 하며 병원비를 맞췄습니다. 4년 동안 혼자 낸 돈은 9,600만 원이었습니다.
올해 9월 말, 어머니는 묵주를 쥔 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49재를 2주 앞둔 일요일, 남매는 유산을 정리하러 시장 뒤 어머니 집에 모였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늦가을 비가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안방에는 국숫집 시절의 낡은 달력과 어머니의 반짇고리, 유품을 담은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올케와 함께 들어와 앉자마자 서류 봉투를 열었습니다. 어머니 인감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증여 계약서였습니다. “누나, 어머니가 이 집은 매주 찾아온 나한테 주신다고 하셨어. 여기 도장도 있잖아.” 올케가 거들었습니다. “형님이야 가까이 사시니까 자주 가신 거고요, 이이는 서울에서 매주 내려왔잖아요.”
정 씨는 한동안 서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매주라는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 씨는 가방에서 두툼한 복사본 묶음을 꺼내 방바닥에 펼쳤습니다. “이건 요양병원 면회 기록부다. 원무과에 사정을 말하고 4년 치를 떼어 왔다.”
장마다 같은 글씨가 이어졌습니다. 날짜, 면회자 정 씨, 관계 큰딸, 밤 아홉 시 반. 남동생의 이름은 몇 장을 넘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 씨가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 줄은 단 세 군데였습니다. 입원하던 날, 이듬해 설날, 그리고 올해 3월 어느 평일 오후였습니다.
“4년 동안 세 번이다. 마지막 날은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 간병인 윤 씨가 그러더라. 네가 서류를 들고 와서 어머니 손에 도장을 쥐여 드리고 갔다고. 그날 이후로 어머니 머리맡 서랍에서 인감도장이 없어졌다.” 남동생의 입이 열렸다 닫혔습니다. 올케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습니다. 방 안에는 낙숫물 소리만 남았습니다.
정 씨는 기록부를 다시 접어 가방에 넣었습니다. “집은 가져가라. 간병비 얘기도 꺼내지 않겠다. 어머니 가시는 길에 돈 문제로 다투고 싶지 않다.” 그리고 유품 상자에서 손때 묻은 나무 묵주를 꺼내 손수건에 쌌습니다. “나는 이거 하나면 된다. 4년 동안 어머니 손을 잡아 준 건 이거하고 나였으니까.” 일어서는 정 씨를 남동생이 “누나” 하고 불렀습니다. 정 씨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라. 나도 이제 나를 위해 살란다.”
그날 저녁 남편은 법으로 따져 볼 길도 있다더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투는 데 남은 세월을 쓰고 싶지 않아요.” 정 씨는 남동생과 올케의 번호를 지우고, 다음 날 복지관 수영 교실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2년 동안 남의 아이들을 실어 나르던 몸을, 이제는 자신을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늙은 왕은 달콤한 말을 늘어놓은 두 딸에게 나라를 나누어 주고, 말없이 곁을 지킨 막내딸을 내칩니다. 왕은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누가 진짜 자식이었는지 깨닫습니다. 말은 서류에 남지만, 정성은 곁에 있었던 시간 속에 남습니다.
간병을 맡은 자식이라면 병원비 영수증과 면회 기록 같은 흔적을 챙겨 두세요.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걸어온 시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끝내 내 몫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면, 그다음 삶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쓰셔도 됩니다.
첫눈 소식이 들려오던 초겨울, 정 씨는 남편이 모는 작은 차 조수석에 앉아 남쪽 바다 끝 섬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22년 만에 처음으로 운전대가 아닌 창밖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었습니다. 언덕 위 오래된 성당 마당에는 동백 봉오리가 붉게 맺혀 있었고, 그 아래로 잔잔한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였습니다. 정 씨는 외투 주머니 속 묵주를 가만히 쥔 채 해가 바다로 내려앉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