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6 12:57

“시댁 서른 명 명절상 차렸는데..” 50년째 추석 자식들이 건 현수막에 펑펑 울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설레는 사람이 있고, 한숨부터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집 맏며느리로 살아온 어머니들에게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니라 한 해 중 가장 고된 날이었습니다. 남의 집 명절상을 차리느라 정작 제 부모 얼굴은 명절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도 적지 않습니다.

최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충청도 산골 마을에서 50년째 고추와 들깨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남편은 6년 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과 딸, 작은아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가정을 꾸렸습니다.

최 씨의 고향은 전라도 남쪽 바닷가 마을입니다. 2남 1녀의 막내로 자라 스물한 살에 중매로 시집왔습니다. 남편은 6남매의 맏이였고, 시댁은 대대로 그 마을을 지켜 온 큰집이었습니다.

시집온 첫 추석, 최 씨가 조심스레 친정 이야기를 꺼내자 시어머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맏며느리가 명절에 집을 비우면 이 집 상은 누가 차리냐. 친정은 한가할 때 다녀와라.” 그러나 명절이 지나면 농사일이 기다렸고, 그 한가할 때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명절이면 시동생 다섯 식구와 시고모들, 조카들, 나중에는 조카의 아이들까지 서른 명이 모였습니다. 최 씨는 이틀 전부터 가마솥에 식혜를 고고 전을 여덟 가지 부쳤습니다. 상을 세 번 차리고 설거지를 마치면 자정이 넘었습니다. 남편이 떠난 뒤에도 시동생들은 “형수님 손맛 아니면 명절 같지 않다”며 해마다 찾아왔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추석 무렵이면 버스 편으로 보따리 하나를 부쳐 왔습니다. 마른 멸치와 김, 그리고 삐뚤삐뚤한 글씨의 쪽지였습니다. “명절에 못 오는 거 다 안다. 몸 상하지 말고 상 잘 차려라.” 최 씨는 그 쪽지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전을 부치며 몰래 울었습니다.

서른 해 전 겨울,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 씨는 도시 병원 장례식장에 하루 다녀왔지만, 이튿날이 시아버지 제삿날이라 하관도 보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그 뒤 오빠들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과의 연락은 끊어졌습니다.

어린 딸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외갓집 없어?” 최 씨는 “멀리 바닷가에 있다”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딸은 그날 밤 엄마가 부엌에서 우는 것을 보았다고 훗날 털어놓았습니다.

올여름, 큰아들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엄마, 올 추석은 각자 쉬어요. 작은아버지들께도 말씀드렸어요. 엄마도 이제 좀 쉬셔야죠.” 딸과 작은아들도 바쁘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최 씨는 “그래, 잘됐다” 하고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추석 전날, 해마다 차 댈 곳이 없던 골목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최 씨는 그래도 손이 허전해 쌀가루를 익반죽하고 뒷산에서 솔잎을 따 왔습니다. 50년 동안 서른 명 몫을 빚던 손이라 송편은 금세 한 소쿠리가 되었습니다.

대청마루에 혼자 앉아 송편을 빚다 문득 이걸 누가 먹나 싶었습니다. 솔잎 위에 가지런한 송편을 내려다보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남의 집 명절만 차리다 제 명절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대문 밖에서 경적이 울렸습니다. 큰아들의 승용차였습니다. 큰아들은 엄마의 젖은 눈가를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웃었습니다. “엄마, 송편은 싸 가요. 좋은 옷 입으세요. 모시고 갈 데가 있어요.”

어디 가느냐고 물어도 큰아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차는 남쪽으로 네 시간을 달렸습니다. 창틈으로 갯내가 스며들고 바다를 낀 굽은 길이 나타나자 최 씨는 숨을 멈췄습니다. 50년 전 이삿짐 트럭 짐칸에 앉아 떠나온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마을 어귀 팽나무는 그대로였습니다. 그 아래 마을 회관에 불이 환했고, 입구에 하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50년 만에 오는 우리 막내 고모, 어서 오세요.’ 차에서 내리던 최 씨는 다리에 힘이 풀려 아들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회관 문이 열리자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어릴 적 갯벌에서 함께 조개를 캐던 사촌 언니, 사촌 오빠들이었습니다. 맨 앞의 여든둘 큰올케가 최 씨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아이고, 막내 아가씨. 살아서 다시 보네.” 그 뒤에서 딸과 며느리들이 앞치마 차림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상 위에는 전어구이와 갓김치, 바지락을 넣은 토란국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추석마다 끓여 주던 그 국이었습니다. 올케들과 딸, 며느리들이 사흘 전부터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했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은 1년 전부터 외가 친척을 찾아 나섰습니다. 실마리는 엄마 장롱 속 낡은 쪽지 뭉치였습니다. 딸이 보따리에 적힌 주소를 들고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 이장님을 거쳐 큰외삼촌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고, 흩어져 살던 외가 식구들을 한 사람씩 이어 놓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주말마다 내려와 사촌들과 외할머니 산소를 손봤습니다. 돌보는 이 없어 풀이 무성하던 봉분을 다시 다지고 상석도 새로 놓았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버지들을 찾아가 올해만은 차례를 각자 지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시동생들은 “형수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꼭 전해라”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이걸 엄마 몰래 1년이나 한 거냐.” 최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큰아들이 엄마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엄마는 평생 남의 집 명절만 차렸잖아요. 올해는 엄마 명절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만 계세요.”

최 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50년 동안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삼켜 온 울음이었습니다. 사촌 언니가 등을 쓸며 말했습니다. “니 엄마가 명절마다 동구 밖에 나가 서 있었다. 막내 오나 하고.” 최 씨가 싸 온 송편은 그날 밤 회관 사람들 손에서 금세 비워졌습니다.

이튿날 아침, 최 씨는 생전 처음 친정어머니 산소 앞에 섰습니다. 새 상석 위에 자식들이 차례상을 올렸고, 최 씨는 그 앞에 엎드려 오래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엄마, 막내 왔어요. 너무 늦게 왔어요.” 바닷바람이 봉분 위 잔디를 쓸고 지나갔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평생 상을 차려 온 사람은 정작 제 몫의 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보다 더 큰 보답은 그 사람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 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님께 어린 시절 명절이 어땠는지 한 번쯤 물어봐 주세요. 그 안에 오래 접어 둔 그리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그리움은 자식의 손으로 펼쳐 드릴 때 가장 따뜻하게 풀립니다.

올가을 최 씨는 큰올케와 나란히 친정 마을 뒷산 산소 길을 걸었습니다. 억새가 은빛으로 흔들렸고, 산 아래 썰물 빠진 갯벌이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최 씨는 내려오는 길에 팽나무 아래 멈춰 서서 50년 전 떠나온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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