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6 05:05

“아들 커피집에 4000만원 보냈는데..” 6년 뒤 생일날 아들이 건 액자에 울었다

자식이 장사를 해 보겠다고 나설 때 부모 마음은 복잡합니다. 말리고 싶은 마음과 밀어주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합니다. 그래서 돈을 보내면서 차마 입으로 하지 못한 말을 통장 한 줄에 담아 보내는 부모도 있습니다.

윤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경상도 바닷가 도시의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 서른두 해째 철물점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둘이 아침 일곱 시에 셔터를 올리고, 못과 경첩과 수도꼭지를 팔며 남매를 키웠습니다. 딸은 일찍 출가했고, 서른여섯 살 아들은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이웃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말수가 적은 아이였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학교가 끝나면 가게 구석에 쪼그려 앉아 크기별로 못을 골라 담았습니다. 한 번도 섞이는 일이 없어서 윤 씨는 손님들에게 “우리 집 못 정리는 아들 담당입니다” 하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군에 간 아들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의 일도 윤 씨는 잊지 못합니다. 아들은 아버지 손바닥의 갈라진 굳은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다음 날 말없이 핸드크림 한 통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윤 씨는 그 통이 빌 때까지 아껴 가며 발랐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다니던 아들은 서른 무렵부터 커피에 빠졌습니다. 주말마다 원두 볶는 법을 배우러 다녔고, 명절에 올 때면 직접 볶은 원두를 종이봉투에 담아 왔습니다. 철물점 손님들에게 한 잔씩 내려 주면 다들 맛이 좋다며 봉투째 사 가겠다고 했습니다.

6년 전 봄, 아들이 가게로 찾아왔습니다. 셔터를 반쯤 내린 저녁이었습니다. “아버지, 회사 그만두고 원두 볶는 가게를 해 보고 싶어요. 4,000만 원쯤 드는데, 대출받아서 해 볼게요.” 윤 씨는 대답 대신 담배만 한 대 태웠습니다.

그날 밤 윤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둔 적금 통장을 꺼냈습니다. 십 년 동안 가게 매상에서 다달이 떼어 부은 노후 자금이었습니다. 아내가 놀라 말렸습니다. “여보, 그거 우리 늙어서 쓸 돈이에요. 가게 문 닫으면 뭘로 살려고요.” 윤 씨가 낮게 말했습니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 저 녀석이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건 지금 한 번뿐이야.”

이튿날 윤 씨는 은행에 가서 적금을 깨고 아들 통장으로 4,000만 원을 보냈습니다. 받는 사람 통장에 남길 메모 칸에서 한참 손가락을 멈췄다가, 일곱 글자를 적었습니다. ‘망해도 괜찮다.’ 아들에게는 따로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1년은 장사가 제법 됐습니다. 그러나 원두값이 크게 오르고 근처에 큰 매장들이 줄줄이 들어서자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가게는 2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 뒤로 아들의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명절에도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면 “괜찮아요, 아버지”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딸을 통해 아들이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빚을 갚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윤 씨는 한번은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아들이 사는 동네까지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골목 어귀에서 한 시간을 앉아 있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돈 때문에 찾아온 것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습니다.

올해 십일월 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생신날 제가 모시러 갈게요. 어머니랑 같이 나와 계세요.” 4년 만에 먼저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생일날 아침은 바닷바람이 유난히 찼습니다. 아들은 낡은 중고 승합차를 몰고 시장 골목 앞에 섰습니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고, 손등에는 기름에 덴 자국이 여럿 있었습니다. 한 시간을 달리는 동안 아들은 어디로 가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차가 멈춘 곳은 이웃 도시 버스 정류장 옆 골목이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국밥’ 두 글자만 적힌 새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탁자 여섯 개가 놓인 좁은 가게 안에서는 커다란 솥이 김을 뿜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문 열었어요.” 아들이 앞치마를 두르며 말했습니다.

아들은 뽀얀 돼지국밥 두 그릇에 부추무침과 깍두기를 내왔습니다. 윤 씨가 수저를 들다가 문득 계산대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계산대 뒤 벽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크게 뽑은 사진이었습니다. 보낸 사람 칸에는 윤 씨 이름이, 금액 칸에는 40,000,000원이, 그리고 맨 아래에는 ‘망해도 괜찮다’가 찍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거 6년 전에 보내 주신 거예요.” 아들이 아버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가게 접고 빚 독촉 전화가 하루에도 몇 통씩 왔어요. 그런 밤마다 휴대폰으로 저 메모를 열어 봤어요. 망해도 괜찮다, 그 한 줄 보고 겨우 잠들었어요.”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아버지 노후 자금인 거 알았어요. 그래서 볼 낯이 없어서 전화를 못 드렸어요. 다시 일어설 때까지는 안 찾아뵙겠다고, 그리고 다시 가게를 열면 이 액자부터 걸겠다고 매일 다짐했어요. 빚은 지난달에 다 갚았어요.”

윤 씨는 수저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국밥에서 김이 올라와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그 김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윤 씨는 끝내 국밥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습니다. 옆에 앉은 아내가 남편의 등을 쓸며 함께 울었습니다.

한참 뒤 윤 씨가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그 돈이 너를 망하게 한 줄 알았다. 괜히 등을 떠밀었나 싶어서 4년 동안 잠을 못 잤어.” 아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 그 돈은 망했지만 저 한 줄은 안 망했어요. 저를 살린 건 저 메모예요.”

윤 씨는 식은 국밥을 그제야 한 숟갈 떠 넣었습니다. “맛있다. 이제 그 돈 갚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 대신 이 국밥을 오래오래 끓여라.” 그날부터 윤 씨는 철물점이 쉬는 일요일마다 아내와 함께 국밥집에 들러 깍두기를 담그고 설거지를 거듭니다.

자식에게 건넨 돈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과 함께 보낸 한마디는 자식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넘어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꾸중보다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는 마음입니다.

연락이 뜸한 자식이 있다면 서운함보다 믿음을 먼저 보내 주세요. 자식은 부모 볼 낯이 없을 때 더 깊이 숨기도 합니다. 그 침묵 너머에서 부모가 남긴 말 한 줄을 붙들고 버티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올겨울 윤 씨는 철물점 셔터를 내린 저녁이면 아내와 함께 시장 끝 방파제까지 천천히 걷습니다. 찬바람 속에 등대 불빛이 깜빡이고, 손에 든 보온병에서는 아들이 담아 준 국밥 국물이 아직 따뜻합니다. 윤 씨는 굳은살 박인 손으로 보온병을 꼭 쥐고 바다를 오래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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