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6 07:31

“조카 병원비 1500만원 대줬는데..” 조카 결혼식 폐백실에서 드러난 오빠 식구의 민낯

형제 사이에 돈이 오갈 때는 차용증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피를 나눈 사이에 서류를 내밀면 정 없어 보일까 봐 말 한마디만 믿고 통장을 열어 줍니다. 그런데 갚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아픈 상처를 남기는 사람은, 갚을 돈이 있으면서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경상도 바닷가 도시에 사는 한 씨는 올해 쉰아홉입니다. 수산시장 입구 골목에서 스물두 해째 김밥집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단무지와 시금치를 손질해 두면, 여섯 시부터 어시장 상인들과 첫 배를 타는 선원들이 줄을 섭니다. 남편은 조선소에서 정년퇴직한 뒤 아내의 가게 일을 돕고 있고, 외동딸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닙니다.

한 씨에게는 세 살 위 오빠가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오빠는 중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한 씨가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오빠가 월급봉투를 통째로 어머니께 드린 덕분이었습니다. 한 씨는 그 은혜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조카를 향한 정도 각별했습니다. 올케가 식당 일을 나가던 시절, 조카는 학교가 끝나면 고모네 김밥집으로 왔습니다. 한 씨는 꼬다리 김밥을 한 접시씩 내주었고, 조카는 그걸 먹으며 가게 구석 평상에서 숙제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조카는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고모 김밥 먹고 컸어요.” 한 씨는 그날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2년 전 늦가을, 오빠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배달 일을 하던 조카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교차로에서 승용차와 부딪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리뼈가 부러지고 골반에도 금이 가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습니다. 과실 비율을 두고 양쪽 보험사가 다투는 바람에 병원비는 우선 가족이 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병원 휴게실에서 오빠는 한 씨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동생아, 1,500만 원만 빌려 다오. 보험금 나오면 바로 갚으마. 몇 달이면 된다더라.” 오빠가 동생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한 씨는 그 자리에서 대답했습니다. “오빠, 그런 말 마. 애부터 살려야지.”

그 돈은 한 씨가 김밥집을 하며 5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이었습니다. 낡은 가게 냉장고와 김밥 마는 기계를 바꾸려고 모아 둔 돈이었습니다. 남편은 잠시 말이 없더니 “처남이 갚는다 했으니 됐다” 하며 은행에 같이 가 주었습니다. 한 씨는 병원 원무과 창구에 직접 가서 수술비와 입원비를 치렀습니다.

반년이 지나고 한 해가 흘렀습니다. 한 씨가 조심스레 물을 때마다 오빠는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보험사가 아직 질질 끈다. 합의가 안 끝났대.” 올케도 명절에 만나면 “아가씨, 우리도 속이 타요” 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씨는 더 묻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가게 냉장고는 두 번이나 고장이 나서 수리 기사를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던 올봄, 조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 씨는 다친 몸으로 좋은 짝을 만난 조카가 기특해서 축의금 100만 원을 따로 봉투에 담았습니다. 오래 입지 않았던 연분홍 한복도 세탁소에 맡겨 손질했습니다. 돈 이야기는 잔치가 끝난 뒤에 꺼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식 날은 맑았습니다. 바닷바람이 조금 쌀쌀했지만 예식장 앞 꽃화분마다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본식이 끝나자 한 씨는 폐백실로 들어갔습니다. 병풍 앞 상에는 밤과 대추, 곶감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혼례복을 입은 조카 내외가 절을 올리자 오빠와 올케가 상석에서 대추를 던져 주었고, 둘러선 친척들이 손뼉을 쳤습니다.

폐백이 끝나고 사진을 찍으려 자리를 옮길 때, 고운 한복을 입은 새 사돈댁이 한 씨에게 다가왔습니다. “고모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한 씨가 고개를 숙이자 사돈댁은 한 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사고 보험금 3,000만 원 덕분에 신혼집 마련했다면서요. 그 몸으로 고생했는데 그거라도 나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한 씨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보험금이요? 그게 언제 나왔는데요?” 사돈댁은 영문도 모른 채 웃었습니다. “작년 봄이라던데요. 그 돈으로 계약금을 걸었다고 사돈어른이 그러시던데요.” 작년 봄이면 사고가 나고 겨우 반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한 씨는 고개를 돌려 오빠를 보았습니다. 오빠는 눈을 피했습니다. 올케는 들고 있던 대추 접시를 내려놓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혼례복 차림의 조카는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얼굴들을 보는 순간 한 씨는 알았습니다.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을, 2년 동안 들은 “아직 안 나왔다”는 말이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는 것을.

폐백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큰집 당숙모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1,500만 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오빠가 겨우 입을 뗐습니다. “애 집 구하는 게 급해서…… 나중에 갚으려고 했다.” 한 씨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연분홍 한복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새벽 네 시마다 밥솥을 열던 손으로 모은 돈이었습니다.

남편이 다가와 한 씨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가자. 오늘은 애 잔칫날이다.” 한 씨는 축의금 봉투를 접수대에 그대로 두고 예식장을 나왔습니다. 그 봉투만큼은 조카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사흘 뒤 한 씨는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2년 전 원무과에서 받은 영수증 사진과 적금을 해지한 통장 사진도 함께 보냈습니다. “오빠, 돈보다 거짓말이 더 아파. 1,500만 원, 다달이라도 갚아 줘. 그래야 내가 오빠를 다시 오빠라고 부를 수 있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조카가 혼자 김밥집에 찾아왔습니다. 조카는 30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고모, 아버지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어요. 나머지는 매달 갚을게요.” 한 씨는 봉투를 받아 들고 조카 앞에 꼬다리 김밥 한 접시를 놓아 주었습니다. “네 아버지한테도 전해라. 고모는 갚는 날까지 기다린다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은 말 대신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체 내역과 영수증, 짧은 문자 한 줄이 훗날 서로를 지켜 줍니다. 그것은 정을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정을 오래 지키는 방법입니다.

돈을 받은 쪽이라면 형편이 어려울수록 솔직해야 합니다. “지금은 못 갚겠다”는 말은 서운함을 남기지만, “아직 안 나왔다”는 거짓말은 핏줄 사이의 믿음을 끊어 놓습니다.

올가을 한 씨는 남편과 함께 시장 뒤편 방파제를 걸었습니다. 고깃배들이 붉은 노을을 등지고 항구로 들어왔고, 갈매기들이 낮게 날며 물결 위를 스쳤습니다. 한 씨는 남편의 팔을 붙잡고 등대에 불이 켜질 때까지 방파제 끝에 서 있었습니다.

OWN 뉴스

당신의 뉴스를 담습니다. 오늘의 건강부터 내일의 노후까지, 꼭 필요한 생활 정보를 전합니다. 하루에 엄청나게 많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