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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집에 반찬을 해 나르는 일은 돈으로 셈하기 어려운 정성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불 앞에 서는 수고는 받는 사람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으면 서운함이 먼저 쌓이기도 합니다.
충청도 작은 도시에 사는 김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원으로 30년을 일하다 7년 전 퇴직했습니다. 하루 칠백 명분 밥을 짓던 손이라 지금도 국 한 솥은 눈대중으로 간을 맞춥니다. 남편은 화물차를 몰다 은퇴했습니다. 외아들은 차로 사십 분 거리의 도시에서 며느리와 맞벌이를 하며 초등학생 손녀 하나를 키웁니다.
며느리는 처음부터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상견례 날에도 고개만 숙일 뿐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신혼 무렵 김 씨가 독감으로 앓아누웠을 때, 퇴근길에 죽을 사 들고 두 시간을 달려온 사람이 며느리였습니다. 김 씨는 그날 말수 적은 사람이 속은 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손녀가 태어나던 해에는 사돈댁과 함께 며느리 산후조리를 도왔습니다. 사돈댁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장에서 혼자 떡집을 꾸려 온 분이었습니다. 미역국을 끓이는 김 씨 옆에서 “사돈 손맛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하며 웃던 얼굴이 김 씨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3년 전 봄, 아들 집에 들렀던 김 씨는 냉장고를 열었다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안에는 배달 음식 용기와 생수병뿐이었습니다.
“얘야, 반찬은 내가 해다 줄 테니 밥만 지어 먹어라.”
“어머니, 힘드신데 괜찮아요.”
“힘들긴. 평생 하던 일인데.”
그날부터 김 씨의 일요일은 새벽 네 시에 시작됐습니다. 멸치볶음, 장조림, 무나물, 시금치나물, 애호박볶음, 두부조림까지 열 가지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먹이던 버릇대로 반찬은 무르고 촉촉하게 만들었습니다. 반찬통 바닥마다 매직으로 날짜를 적는 것도 급식실 시절 그대로였습니다. 김 씨는 그 통들을 보자기에 싸서 버스를 갈아타고 아들 집 문 앞까지 날랐습니다.
남편은 “사 먹으라고 해. 당신 무릎도 성치 않은데” 하며 말렸지만, 김 씨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30년 동안 급식실 바닥에 서 있느라 무릎 연골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 있었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김 씨 마음에 작은 가시가 돋았습니다. 며느리는 반찬을 받을 때 “네, 어머니” 할 뿐, 맛있었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빈 통도 점점 줄었습니다. 통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며느리는 “회사에 가져갔다가요…” 하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명절이면 친정엄마는 가게 일로 바쁘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며느리가 현관에서 보자기를 받으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제 안 보내셔도 돼요.” 김 씨는 웃으며 돌아섰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창밖만 보았습니다. ‘먹지도 않고 버렸구나. 통이 안 돌아온 것도 그래서였구나.’ 그 무렵 병원에서는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권했지만, 김 씨는 일요일 반찬을 핑계로 수술 날짜를 두 번이나 미뤄 둔 참이었습니다.
김 씨는 서운함을 누르고 반찬을 반으로 줄여 계속 보냈습니다. 며느리는 더는 말리지 않았고, 고맙다는 말도 여전히 없었습니다.
올해 시월 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돈댁이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돈이 2년 넘게 요양병원에 있었다는 사실도 김 씨는 그날 처음 들었습니다. 수화기를 든 손이 떨렸습니다.
장례식장 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상복을 입은 며느리는 빈소 한쪽에 앉아 김 씨와 눈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신발을 신는데,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김 씨를 불러 세웠습니다. 사돈을 2년 동안 돌본 간병인 최 씨였습니다.
“혹시 반찬 해 주시던 사돈어른 맞으시지요? 이건 꼭 직접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최 씨가 내민 것은 꽃무늬가 다 바랜 낡은 장바구니였습니다. 안에는 빈 반찬통 수십 개가 포개져 있었습니다. 하나를 뒤집어 보니 바닥에 김 씨 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동안 돌아오지 않던 바로 그 통들이었습니다.
뚜껑마다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사돈 멸치볶음’, ‘사돈 무나물’, ‘사돈 장조림’. 펜을 쥐기도 힘든 손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였습니다.
“어머님이 음식을 삼키기 어려운 병이셨어요. 병원 밥은 몇 숟갈도 못 넘기셨는데, 사돈어른 반찬은 잘게 잘라 드리면 그렇게 잘 드셨어요. 일요일 저녁만 기다리셨지요.”
장바구니 맨 아래에는 접힌 쪽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사돈 반찬 덕에 밥 한 공기 다 먹었소. 고맙다는 말을 끝내 못 했소.’ 김 씨는 쪽지를 쥔 채 장례식장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뒤따라 나온 며느리가 김 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엄마 반찬까지 하시느라 더 무리하실까 봐 말을 못 했어요. 매주 절반을 덜어서 병원에 갖다드렸어요.”
며느리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안 보내셔도 된다고 한 건… 어머니가 무릎 수술을 자꾸 미루시는 게 걱정돼서였어요. 고맙다고 하면 다 들킬 것 같아서 그 말도 못 했어요.”
김 씨는 며느리의 젖은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버려졌다고 믿었던 반찬은 다른 병상에서 한 사람의 마지막 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같이 걱정하면 될 걸 혼자 다 지고 있었구나.”
장례를 마치고 김 씨는 미뤄 두었던 무릎 수술을 받았습니다. 며느리는 매일 퇴근길에 병실에 들렀습니다. 손에는 서툴게 무친 시금치나물이 든 반찬통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했는데 맛이 안 나요.” 김 씨는 웃으며 한 통을 다 비웠습니다.
정성을 건네는 쪽만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말없이 받는 쪽도 저마다 사정을 품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없다고 서운함부터 키우기 전에, 그 침묵 뒤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쯤 물어봐 주세요.
받는 쪽이라면 짐이 될까 봐 숨기기보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정을 털어놓는 편이 낫습니다. 가족은 짐을 나눠 지라고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첫눈이 내리던 날, 김 씨는 아들 집 베란다에서 며느리와 처음으로 함께 김장을 했습니다. 수술한 무릎 때문에 김 씨는 의자에 앉아 간만 보았고, 배추는 며느리가 버무렸습니다.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쌓여 갔고, 두 사람은 김치를 담은 통을 그 낡은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넣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