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 사이의 거리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누구는 곁을 지키고, 누구는 전화로만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떠난 뒤 남은 재산을 나눌 때, 그 거리는 다시 한번 셈이 되어 돌아옵니다.
조 씨는 올해 쉰일곱입니다. 전라도 바닷가 도시에서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원으로 열여섯 해째 일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항구 옆 냉동창고에서 일하고, 장성한 아들과 딸은 모두 객지에서 살림을 차렸습니다. 조 씨는 삼남매 가운데 둘째딸입니다.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수산시장 골목에서 서른 해 넘게 젓갈 장사를 했습니다. 입버릇처럼 “아들은 집안 기둥”이라고 했습니다. 큰오빠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조 씨는 상고를 나와 일찍 돈을 벌었습니다. 언니가 시집갈 때 어머니는 아끼던 금가락지와 비취반지를 내주었습니다. 조 씨가 결혼할 때 받은 것은 이불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조 씨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신혼 시절 단칸방에 어머니가 젓갈 한 통을 들고 와 “밥은 굶지 마라” 하고 돌아서던 뒷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손등이 갈라지도록 일하던 어머니를 가장 오래 곁에서 본 사람도 조 씨였습니다.
여섯 해 전 겨울, 어머니가 새벽 네 시에 맨발로 시장 골목을 헤매다 경찰 손에 이끌려 왔습니다. 병원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매라고 했습니다. 삼남매가 마주 앉은 자리에서 큰오빠는 “서울 사는 내가 어떻게 모시냐”고 했습니다. 언니는 “나는 시어머니 모시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조 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모실게. 엄마 우리 집으로 모시자.” 그날 밤 남편은 말없이 작은방을 비웠습니다. “장모님 쓰시게 침대는 창문 쪽에 놓읍시다. 아침 햇볕이 잘 드니까.”
그날부터 조 씨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씻기고 아침을 먹여 주간보호센터 차에 태운 뒤 급식실로 출근했습니다. 수백 명 아이들의 점심을 짓고 돌아오면 다시 어머니 차례였습니다. 밤에는 두세 번씩 일어나 기저귀를 갈았습니다. 센터 비용과 기저귀값은 모두 조 씨 월급에서 나갔습니다.
센터 사회복지사 윤 씨가 공책 한 권을 건넨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어머님 상태를 날마다 적어 두세요. 진료 보실 때 큰 도움이 돼요.” 조 씨는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무엇을 드셨는지, 몇 번 깨셨는지, 누구를 알아보셨는지. 공책은 여섯 해 동안 열한 권이 되었습니다.
큰오빠와 언니는 명절에만 다녀갔습니다. 과일 상자를 내려놓고 한두 시간 앉았다가 “고생한다”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조 씨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날이 늘어 갈 때도, 큰오빠는 전화로 “엄마 집은 잘 있냐”부터 물었습니다. 조 씨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넘겼습니다.
올여름, 어머니는 조 씨 집 작은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사람도 조 씨였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석 달이 지난 늦가을, 삼남매는 시장 골목 끝 어머니의 옛집에 모였습니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습니다. 여섯 해 동안 비어 있던 집에는 묵은 젓갈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고, 안방에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온 자개장이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큰오빠가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방바닥에 펼쳤습니다. 공증사무소 도장이 찍힌 유언장이었습니다. “엄마가 생전에 집은 장남한테 준다고 하셨다. 공증까지 받아 두셨어.” 유언장에 적힌 날짜는 세 해 전 사월 열이레였습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 뜻이면 따라야지. 제사도 오빠가 모실 거고.” 조 씨는 유언장의 날짜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낡은 공책 한 권을 꺼냈습니다.
“오빠, 그날 엄마가 어땠는지 나는 다 적어 놨어.” 조 씨는 사월 열이레 장을 펼쳐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엄마가 오늘 나를 못 알아보심. 오빠가 바람 쐬어 드린다며 오후에 모시고 나감. 저녁에 돌아와 종일 우셨음.”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큰오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날은 엄마 정신이 맑았어.” 조 씨는 앞장을 넘겼습니다. “사월 열엿새, 숟가락 쥐는 법을 잊으심. 내 손을 잡고 언니라고 부르심.” 뒷장도 넘겼습니다. “사월 열여드레, 집에 가야 한다며 밤새 현관문을 두드리심.”
그날 일지에는 한 줄이 더 있었습니다. “밤에 언니한테 전화함. 오빠가 엄마 모시고 어디 갔었냐 물으니, 오빠가 알아서 하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함.”
언니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큰오빠가 언니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너도 다 알았잖아! 집 정리되면 바닷가 밭은 너 준다니까 좋다고 했잖아!” 언니의 입술이 떨렸습니다. 언니는 그날 일을 알고도 밭 한 뙈기를 약속받고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조 씨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공책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집이 아까워서 이러는 거 아니야. 엄마가 그날 왜 종일 우셨는지, 그게 이제야 알아져서 그래. 엄마는 자기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서우셨던 거야.”
조 씨는 그 주에 법률 상담을 받았습니다. 유언할 당시 어머니에게 판단 능력이 없었다면, 공증을 받은 유언장이라도 효력을 다툴 수 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진료기록과 센터 기록, 그리고 열한 권의 일지가 있었습니다. 조 씨가 그 이야기를 전하자 큰오빠는 며칠 뒤 유언장을 거두고 법대로 똑같이 나누자고 했습니다.
조 씨는 제 몫을 받던 날, 어머니 이름으로 주간보호센터에 기저귀를 들여보냈습니다. 언니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울었습니다. 조 씨는 전화를 받았지만, 예전처럼 “괜찮아”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간병은 돈으로 다 갚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딘 사람의 기록은 거짓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부모를 모시고 있다면 하루 몇 줄이라도 적어 두세요. 그것은 다툼을 위한 증거이기 전에, 부모와 함께한 날들의 가장 정직한 기억입니다.
부모의 재산보다 부모의 마지막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세요. 집 한 채는 나눌 수 있어도, 형제 사이에 한 번 금이 간 믿음은 쉽게 이어 붙일 수 없습니다.
첫 추위가 찾아온 날, 조 씨는 남편과 함께 어머니가 잠든 바닷가 언덕에 올랐습니다. 언덕 아래로 잿빛 바다가 잔잔하게 펼쳐졌고, 비탈의 동백나무에는 붉은 꽃망울이 하나둘 맺혀 있었습니다. 조 씨는 어머니 앞에 마지막 공책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