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을 가진 사람과 그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계약서로 묶인 사이입니다. 그래도 한 지붕 아래서 십 년 가까이 얼굴을 보다 보면 계약서에 없는 정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어려울 때 사정을 봐주는 것도, 그 사정을 고맙게 받는 것도 다 그 정 때문입니다.
충청도 작은 도시에 사는 윤 씨는 올해 일흔입니다. 열아홉에 대패를 잡아 마흔 해 가까이 목수로 일했습니다. 한옥 서까래부터 아파트 붙박이장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쉰다섯에 시장 입구의 낡은 3층 상가 건물을 샀습니다. 아내와 둘이 3층에 살고, 외아들은 수도권에서 직장에 다닙니다.
1층 국밥집은 윤 씨가 건물을 산 이듬해 들어왔습니다. 주인 강 씨는 쉰 줄의 사내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을 다쳐 국밥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윤 씨는 그 사정이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개업 전날 밤 연장을 들고 내려가 손님이 앉을 나무 평상과 카운터를 손수 짜 주었습니다. 출입문 옆 나무 차림표도 윤 씨가 글자를 한 자 한 자 파서 걸어 주었습니다.
강 씨는 그 뒤로 윤 씨를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겨울이면 사골 국물을 한 솥 끓여 3층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윤 씨 아내가 몸살로 누웠을 때는 죽을 쑤어 문 앞에 두고 갔습니다. 윤 씨도 국밥집 화장실 문짝이 내려앉으면 말없이 내려가 고쳐 주었습니다.
8년 전 봄, 시장 옆에 큰 마트가 들어서면서 골목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강 씨가 소주 한 병을 들고 3층으로 올라왔습니다.
“형님, 이대로면 석 달을 못 버팁니다. 월세 250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윤 씨는 한참 술잔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습니다. “150만 내게. 장사 살아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세.”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여보, 우리도 그 월세로 생활비 하고 건물 대출 갚잖아요.” 윤 씨는 목수 시절부터 붓던 적금 하나를 깨서 대출 원금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생활비를 아껴 쓰자고 했습니다. “사람이 먼저 살아야 건물도 사는 거요.”
그렇게 8년이 흘렀습니다. 한 달에 100만 원, 1년이면 1,200만 원이었습니다. 그사이 강 씨는 가게 안쪽을 합판으로 막아 작은 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열쇠와 도장을 파는 한 씨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강 씨는 “사촌 동생인데 자리 잡을 때까지 잠깐 같이 쓰는 겁니다. 돈은 안 받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윤 씨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장사는 조금씩 살아나는 듯했습니다. 점심때면 국밥집 앞에 줄이 섰고, 강 씨는 새 차를 뽑았습니다. 그래도 월세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않았습니다. 윤 씨는 서운했지만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깎아 준 사람이 다시 올려 달라고 하는 게 어쩐지 쩨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건물 안전 점검에서 문제가 나왔습니다. 지은 지 마흔 해가 넘은 건물의 기둥과 보에 금이 가 있었습니다. 목수인 윤 씨가 보기에도 더는 손볼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윤 씨는 건물을 헐고 새로 짓기로 했습니다. 세입자들에게 1년 앞서 알리고 이사 비용을 보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 건물이 들어서면 원래 세입자에게 먼저 자리를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지난 9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이었습니다. 재건축 일정을 설명하는 상인 회의가 장사를 마친 국밥집에서 열렸습니다. 윤 씨가 짜 준 평상 위에 미용실, 약국, 반찬가게 주인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윤 씨는 공사 일정표와 이사 비용 계산서를 한 장씩 나눠 주었습니다.
그때 강 씨가 일어나 종이 한 장을 펼쳤습니다. 맨 위에 굵은 글씨로 ‘건물주 갑질 규탄 및 정당한 보상 요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건물에서 몇 년을 장사했습니까. 그런데 건물주 마음대로 헐 테니 나가라고 합니다. 이사비 몇 푼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다 같이 서명해서 제대로 받아 냅시다.”
윤 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8년 동안 형님이라 부르던 입에서 ‘갑질’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손에 쥔 일정표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몇몇 상인이 머뭇거리며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서명지가 합판 칸막이 앞에 앉은 한 씨에게 넘어갔습니다. 한 씨는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강 사장님, 갑질이라고 하셨어요? 그럼 내가 6년 동안 사장님한테 매달 꼬박꼬박 낸 전대료 120만 원은 뭡니까? 건물주님 허락받은 거라더니,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니던데요.”
국밥집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빗소리만 함석 처마를 두드렸습니다. 강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 그건 관리비 명목으로…” 한 씨가 휴대전화를 꺼내 이체 내역을 넘겨 보였습니다. 매달 같은 날, 같은 금액이 강 씨 계좌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윤 씨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사촌 동생이라던 한 씨는 남이었고, 돈을 안 받는다던 칸막이 자리에는 월세가 매겨져 있었습니다. 윤 씨가 깎아 준 100만 원의 자리에 강 씨는 120만 원짜리 가게를 몰래 들여놓았던 것입니다. 장사가 어렵다며 깎은 월세에 웃돈까지 얹어 챙겨 온 셈이었습니다.
윤 씨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명지를 집어 반으로 접었습니다.
“강 사장, 내가 자네한테 깎아 준 돈이 8년이면 9,600만 원이네. 그 돈 돌려 달라는 소리는 안 하겠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하지만 주인 몰래 세를 놓은 건 계약을 어긴 걸세. 이사비는 계약서대로만 셈하겠네. 그 이상은 없네.”
그러고는 한 씨를 돌아보았습니다. “한 사장은 6년 동안 이 건물에서 장사한 사람이오. 다른 분들과 똑같이 이사비를 드리고, 새 건물에도 자리를 드리겠소.”
상인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반찬가게 주인이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사장님이 그동안 월세 깎아 준 거, 우리는 꿈에도 몰랐네요.” 강 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3층으로 올라온 윤 씨는 아내 앞에 앉아 한참 말이 없었습니다. “여보, 나무는 결을 보면 아는데, 사람은 결이 안 보입디다.” 아내는 남편의 거친 손을 감싸 쥐었습니다. “당신이 베푼 게 잘못은 아니에요. 확인을 안 한 게 아쉬울 뿐이지.”
한 달 뒤 강 씨는 짐을 쌌습니다. 떠나는 날, 윤 씨가 파 준 나무 차림표만은 떼어 3층 문 앞에 세워 두고 갔습니다. 쪽지 한 장 없었습니다. 윤 씨는 그 차림표를 말없이 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정으로 깎아 준 월세는 상대가 그 마음을 알 때 비로소 값을 합니다. 사정을 봐줄 때는 기간과 조건을 한 줄이라도 적어 두세요. 가게에 낯선 사람이 들어서면 한 번쯤 직접 물어보세요. 묻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서로의 정을 지키는 일입니다.
베푼 마음이 배신으로 돌아와도 그 마음까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 인심은 조금 더 밝은 눈으로 건네면 됩니다.
올가을, 헐린 건물 터에 새 기둥이 하나둘 올라갔습니다. 윤 씨는 해 질 무렵이면 공사장 가림막 앞에 서서 철골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길 건너 임시 가게 앞을 쓸던 한 씨가 허리를 펴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시장 골목 끝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