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5 07:04

“적금 깨서 아랫집에 1500만원 줬는데..” 층간소음 회의 스피커에서 드러난 아랫집 민낯

이웃이 무너질 때 손을 내미는 일은 오래 정을 나눈 사이라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돈을 건네면서도 날짜나 이자를 따지지 않고, 형편이 나아지면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갚을 길이 막막해진 사람에게 빌린 돈은 고마움보다 짐이 되기도 합니다.

박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경상도 내륙의 한 소도시에서 28년째 세탁소를 하고 있습니다. 시장 입구 모퉁이의 작은 가게에서 남편은 다림질을, 박 씨는 수선과 손님 응대를 맡았습니다. 아들은 수도권에서 회사에 다니고, 딸은 시집가 아이 둘을 키웁니다. 부부는 가게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인 오래된 아파트 7층에 삽니다.

아랫집에는 최 씨 부부가 8년 전 이사 왔습니다. 최 씨는 시내에서 돼지국밥집을 했고, 아내는 주방을 지켰습니다. 개업하던 날 박 씨는 하얀 앞치마 열 장을 빳빳하게 다려 선물했습니다. 그 뒤로 최 씨는 장사를 마치면 남은 수육을 봉지에 담아 7층 현관 손잡이에 걸어 두곤 했습니다.

부부의 외아들은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식당이 바쁜 저녁이면 아이는 세탁소 구석 의자에 앉아 숙제를 했습니다. 박 씨는 아이에게 붕어빵을 사 먹이고, 가게 문을 닫으면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박 씨를 ‘세탁소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2년 전 겨울, 최 씨의 국밥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근처에 큰 식당이 들어서고 재료값이 오르자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석 달 치 월세가 밀렸고, 직원 두 사람의 월급도 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밤 최 씨 아내가 눈이 퉁퉁 부은 채 7층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형님, 염치없는 줄 압니다. 직원들 월급은 꼭 줘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부부에게는 낡은 스팀 보일러를 바꾸려고 5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박 씨는 적금을 깨 1,500만 원을 최 씨 계좌로 보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말했습니다. “차용증 같은 거 안 써도 돼요. 형편 펴지면 그때 갚아요.” 최 씨는 박 씨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아랫집 부부는 박 씨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최 씨는 대리운전을 하고 아내는 마트 계산대에서 일한다는 소식만 건너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최 씨 아내는 휴대전화만 들여다보았습니다. 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박 씨는 그 냉랭함이 더 서운했습니다.

올봄부터는 밤마다 박 씨네 거실 바닥이 쿵쿵 울렸습니다. 아랫집에서 긴 막대로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였습니다. 밤 열한 시가 넘으면 우퍼 스피커의 둥둥거리는 저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아홉 시면 불을 끄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부부였습니다. 참다못해 관리사무소를 찾았더니, 아랫집에서도 위층이 밤마다 쿵쿵거린다는 민원을 넣어 둔 터였습니다. 관리사무소는 층간소음 조정 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장맛비가 그치지 않던 7월 저녁, 관리사무소 2층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긴 탁자 위에 종이컵과 생수병이 놓였고, 창밖 홈통으로 빗물이 쏟아졌습니다. 관리소장과 외부 조정위원, 동 대표, 같은 라인 이웃 세 집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최 씨 부부는 박 씨 쪽을 보지 않았습니다. 최 씨 아내가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말로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증거 들려드릴게요. 한 달 동안 밤마다 녹음한 거예요.”

관리소장이 휴대전화를 회의실 스피커에 연결했습니다. 쿵, 쿵, 쿵. 묵직한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습니다. 이웃들이 박 씨 부부를 흘끔거렸고, 박 씨는 무릎 위에서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런데 쿵 소리 사이로 쇠붙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섞여 나왔습니다. 이어 앳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엄마, 덤벨 열 세트 끝났어. 줄넘기 더 해?”

조정위원이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건 위층이 아니라 녹음하신 집 안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최 씨 아내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녹음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문 닫히는 소리 뒤로 부부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애 체대 실기 연습하는 거 들키면 안 되는데.”

“위층 소리라고 하면 돼. 계속 시끄럽게 하면 못 버티고 나가겠지. 위층 이사 가게 만들면 그 돈 안 갚아도 돼.”

스피커가 꺼지고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이웃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 돈이라니, 무슨 돈이요?” 최 씨는 탁자만 내려다보았고, 최 씨 아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습니다.

박 씨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2년 전 겨울, 직원 월급 주라고 적금 깨서 보낸 1,500만 원이에요. 형편 펴지면 갚으라던 말은 지금도 그대로예요. 그런데 이사는 안 갑니다. 이제부터는 기록으로 정리합시다.”

박 씨가 보여 준 계좌 이체 내역을 보고 조정위원은 차용증이 없어도 이런 기록은 빌려준 돈임을 밝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관리소장은 일부러 소음을 내는 행위는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스피커부터 치우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최 씨 부부는 매달 30만 원씩 갚겠다는 약속서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키가 훌쩍 자란 아랫집 아들이 7층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할머니, 저 때문에… 죄송해요.” 박 씨는 아이 어깨를 토닥였습니다. “너는 잘못한 거 없다. 실기 잘 봐라.” 문을 닫고 박 씨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습니다. 화보다 허탈함이 컸지만, 붕어빵을 먹던 아이만큼은 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솝 우화에는 얼어 가는 뱀을 품에 녹여 준 농부가 깨어난 뱀에게 물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빚이 부끄러움이 되면 사람은 고마운 이를 먼저 밀어내기도 합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정을 앞세우더라도 계좌로 보내고 짧은 약속서라도 남겨 두세요.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억울한 일 앞에서는 목소리보다 기록이 끝내 내 자리를 지켜 줍니다.

올가을 박 씨는 남편과 세탁소 셔터를 내리고 시장 골목을 걸어 집으로 향했습니다. 길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고, 붕어빵 수레에서 고소한 김이 피어올랐습니다. 박 씨는 붕어빵 한 봉지를 사서 남편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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