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한 그릇을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매일 같은 반찬을 나눠 먹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렇게 건넨 밥상은 언젠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경상도 바닷가 소도시에 사는 조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시장 골목에서 27년 동안 반찬가게를 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가게 불을 켜고 멸치를 볶고 콩을 졸였습니다. 남편은 십 년 전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은 수도권에서 가정을 꾸려 살고 있습니다. 예순셋에 무릎이 나빠져 가게를 접은 뒤로 조 씨는 오래된 빌라 2층에서 혼자 지냅니다.
가게를 정리하던 그해 봄, 아랫집에 부녀가 이사를 왔습니다. 마흔 중반의 한 씨와 초등학교 1학년 딸이었습니다. 한 씨는 몇 해 전 병으로 시력을 잃어 앞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안마원에 나가 일하며 혼자 딸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저녁 조 씨는 계단참에 쪼그려 앉은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무릎 위에 컵라면을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늦게 와요. 불 쓰면 위험하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며칠 뒤에는 아랫집에서 탄내가 올라왔습니다. 한 씨가 더듬더듬 달걀을 부치다 프라이팬을 태운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조 씨는 가게에서 쓰던 네모난 반찬통 세 개를 꺼냈습니다. 멸치볶음과 콩자반, 시금치무침을 담고 뚜껑마다 종이테이프를 붙여 반찬 이름을 적었습니다. 27년 동안 가게 진열대에서 하던 버릇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닐봉지에 담아 아랫집 문고리에 걸어 두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한 씨가 빈 통을 들고 계단을 올라왔습니다. “할머니, 고맙지만 이렇게 신세 질 수는 없습니다.” 조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가게 접고 나니 손이 근질거려서 그래요. 혼자 먹자고는 안 하게 되니, 핑계 삼아 하는 거예요.” 한 씨는 한참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뒤로 조 씨는 저녁마다 반찬 두세 가지를 담아 문고리에 걸었습니다. 장 보는 돈은 연금에서 떼어 냈습니다. 시장에 나가면 옛 이웃 상인들이 “아직도 그 집 반찬 해요?” 하며 무 한 개, 두부 한 모를 더 얹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면 깨끗이 씻은 빈 통이 조 씨네 문고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빈 통을 돌려줄 때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할머니, 우엉조림은 왜 반짝반짝해요?” “물엿을 마지막에 넣어서 그래.” “멸치는 왜 안 비려요?” “기름 없이 먼저 한 번 볶아서 그렇지.” 조 씨는 아이가 궁금한 게 많은가 보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키가 훌쩍 크더니 말수가 줄었습니다. 빈 통은 여전히 아침마다 걸려 있었지만, 문을 두드리는 일은 드물어졌습니다. 조 씨는 서운했습니다. ‘다 커서 할머니 반찬이 귀찮아졌나.’ 그래도 저녁이 되면 손은 저절로 냄비를 찾았습니다.
조 씨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칼질하는 손이 예전 같지 않았고 혈압약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전화할 때마다 “엄마, 이제 남의 집 반찬은 그만하세요” 했습니다. 조 씨는 “그 집 문고리가 비면 내 마음이 비어” 하며 웃어넘겼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첫눈이 내린 저녁이었습니다. 무조림을 뒤적이던 조 씨의 오른손에서 국자가 툭 떨어졌습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 씨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날 아랫집 문고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8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아이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고, 쓰러진 조 씨를 보고 곧장 119에 전화했습니다. 뇌경색이었습니다. 의사는 빨리 병원에 와서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조 씨는 한 달 동안 입원해 재활 치료를 받았습니다. 오른손에 조금씩 힘이 돌아왔지만, 밤마다 병실 천장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제 반찬은 못 하겠구나. 그 집 애는 저녁을 어떻게 먹나.’
1월 중순, 퇴원하는 날은 바닷바람이 맵게 불었습니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달 만에 집에 들어선 조 씨는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반찬통이 빼곡했습니다. 8년 동안 아랫집에 건넨 것과 똑같은 네모난 통들이었습니다. 뚜껑마다 종이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1월 15일 멸치볶음] [1월 15일 콩자반] [1월 16일 우엉조림].
“얘야, 네 처가 해 놓고 갔니?” 아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도 처음 봐요, 엄마.”
그때 현관 벨이 울렸습니다. 한 씨와 딸이 서 있었습니다. 아이 품에는 손때 묻은 공책 여러 권이 안겨 있었습니다. 맨 위 표지에 글씨가 보였습니다. [할머니 반찬 공책].
“할머니, 빈 통 돌려드릴 때마다 맛을 적었어요. 모르는 건 여쭤보고요.” 아이가 공책을 펼쳤습니다. 삐뚤빼뚤한 초등학생 글씨로 ‘우엉조림, 물엿은 마지막에’라고 적힌 쪽이 있었고, 뒤로 갈수록 글씨가 어른스러워졌습니다.
한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눈이 안 보여 할머니 반찬을 맛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 맛을 다 받아 적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이 아이가 조리고에 합격했습니다. 면접에서 이 공책 이야기를 했답니다.”
아이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할머니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공책 펴 놓고 하나씩 만들었어요. 해 주신 그대로요. 그런데 콩자반은 간을 조금 줄였어요. 혈압 조심하셔야 한다고 해서요.”
조 씨는 콩자반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습니다. 27년 동안 가게에서 졸이던 바로 그 맛이었습니다. 조금 싱거웠을 뿐이었습니다. 조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젓가락을 쥔 채 아이의 손을 끌어당겼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말수가 줄었던 그 몇 해 동안, 아이는 혼자 공책을 펴 놓고 할머니의 맛을 연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엄마, 그만하라던 말 취소할게요. 엄마가 걸어 둔 게 반찬만은 아니었네요.”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했습니다. 매일 저녁 건넨 작은 정성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받는 사람 안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립니다.
이웃의 끼니를 걱정해 본 적이 있다면 그 마음을 작게 여기지 마세요. 문고리에 건 반찬 한 통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길이 되고, 그 정은 내가 가장 힘든 날 가장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올봄 입학식을 마친 날 오후, 조 씨는 지팡이를 짚고 새 교복 차림의 아이와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옛 가게 자리 앞 화단에는 매화가 하얗게 피었고, 생선 좌판 위로 봄볕이 내려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무와 우엉을 한 봉지씩 사 들고 해가 기울 때까지 골목을 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