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6 08:43

“아랫집 아이에게 저녁밥 차려 줬는데..” 9년 뒤 그 아이가 보낸 초대장 하나에 눈물이 났다

이웃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챙기는 일은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정입니다. 밥 한 그릇과 따뜻한 자리 하나를 내어 준 사람은 대개 그 일을 금세 잊습니다. 그러나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그 밥 한 그릇이 오래도록 식지 않기도 합니다.

충청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신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시장 입구 낡은 삼층 건물 1층에서 35년째 세탁소를 하고, 3층 살림집에서 남편과 둘이 삽니다. 남편은 몇 해 전 허리 수술을 받은 뒤로 다림질에서 손을 떼고 배달만 거들고 있습니다. 두 딸은 출가해 서울에 삽니다.

12년 전 봄, 건물 2층에 젊은 엄마와 여덟 살 아들이 세 들어왔습니다. 서른 중반의 윤 씨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시내 식당에서 밤 아홉 시까지 일했습니다.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빈집에 들어가 혼자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그해 겨울 어느 저녁, 신 씨는 셔터를 내리다 계단참에 웅크린 아이를 보았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린 아이는 컵라면 하나를 품에 안은 채 떨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엄마 오면 물 끓여 먹으려고요.” 신 씨는 아무 말 없이 아이 손을 잡아 세탁소 난로 앞에 앉혔습니다.

그날 신 씨가 부랴부랴 만든 반찬은 계란말이였습니다. 달걀 네 개에 파를 송송 썰어 넣고 도톰하게 말아 냈더니, 아이는 밥 두 공기와 함께 한 접시를 다 비웠습니다. 그날부터 아이의 저녁 자리는 세탁소 안쪽의 작은 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다림질대 옆에서 숙제를 했고, 졸리면 손님 옷 사이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나중에는 옷걸이에 번호표를 거는 일까지 거들었습니다. 단골손님들이 “손주가 생겼네” 하며 웃으면 신 씨는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윤 씨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흰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할머니, 반찬값이라도 받아 주세요. 이러시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어요.” 신 씨는 봉투를 도로 윤 씨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었습니다. “우리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건데 무슨 돈이야. 그 돈으로 아이 운동화나 사 줘요.”

신 씨는 장을 볼 때마다 달걀 한 판을 따로 샀습니다. 세탁소 벌이가 시원찮은 달에도 그 달걀만은 거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혀를 차던 남편도 어느새 배달 다녀오는 길에 아이가 좋아하는 요구르트를 사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아이는 키가 한 뼘이나 자랐고, “할머니, 오늘 계란말이는 좀 짜요” 하며 넉살을 부렸습니다. 신 씨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저녁을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열한 살 되던 해 겨울, 2층이 하룻밤 사이에 텅 비었습니다. 새벽에 트럭 소리가 났다는 말만 돌았습니다. 세탁소 문고리에는 깨끗이 씻은 반찬통 하나가 비닐봉지에 담겨 걸려 있었습니다. 쪽지 한 장 없었습니다.

며칠 뒤 낯선 남자들이 찾아와 윤 씨 행방을 묻고 돌아갔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구나 짐작은 했지만 서운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3년을 끼고 살았는데 어떻게 인사 한마디가 없나.” 남편은 “사정이 있었겠지, 이제 잊어버려” 했지만, 신 씨는 한동안 저녁마다 달걀을 더 깨다 말고 멈칫하곤 했습니다.

9년이 흘렀습니다. 신 씨의 손목은 다림질로 시큰거렸고 세탁소 간판 글씨도 바랬습니다. 그래도 계란말이를 부칠 때면 난로 앞에서 밥을 먹던 작은 뒤통수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2월 초,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오후였습니다. 집배원이 세탁소 문을 열고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보낸 사람 칸에는 바닷가 도시의 한 고등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졸업식 초대장과 공책을 찢어 쓴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머니, 저 2층 살던 계란말이 먹보예요. 졸업식에 꼭 와 주세요. 할머니 자리 맡아 둘게요.” 신 씨는 쪽지를 든 채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남편이 안경을 고쳐 쓰고 들여다보더니 말했습니다. “가 봐야지. 나도 같이 가겠소.”

졸업식 날, 부부는 첫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학교에 닿았습니다. 강당 입구에서 머뭇거리는데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자가 달려왔습니다. 윤 씨였습니다. 윤 씨는 신 씨 손을 붙잡더니 허리를 깊이 숙였습니다.

“할머니, 그날 밤 빚 독촉하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온다고 해서 짐만 싸서 도망치듯 나왔어요. 인사드리러 가면 할머니 댁까지 시끄러워질까 봐 못 갔어요. 그 뒤로는 볼 낯이 없어서 전화 한 통을 못 드렸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윤 씨는 몇 해 전에야 빚을 다 갚고 지금은 작은 분식집을 꾸린다고 했습니다.

윤 씨가 부부를 이끈 곳은 강당 맨 앞줄이었습니다. 가운데 의자 두 개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 장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우리 저녁밥 할머니’, 다른 한 장에는 ‘요구르트 할아버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남편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졸업생 대표 답사 순서가 되자 키가 훌쩍 큰 청년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웃을 때 한쪽 볼에만 들어가는 보조개를 보고 신 씨는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청년은 원고를 내려놓고 맨 앞줄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엄마가 밤늦게까지 일하셔서 늘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 아래층 세탁소 할머니가 3년 동안 매일 저녁 계란말이를 해 주셨습니다. 그 할머니 덕분에 저는 하루도 혼자 밥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오늘 그 할머니가 여기 와 계십니다.”

강당에 박수가 터졌습니다. 신 씨는 손수건을 꺼냈지만 금세 흠뻑 젖어 버렸습니다. 남편이 자기 손수건을 내밀었고, 신 씨는 그것마저 다 적시도록 울었습니다. 9년 동안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서운함이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식이 끝나자 청년이 꽃다발을 들고 달려와 신 씨를 안았습니다. “할머니, 그날 반찬통은 제가 씻어서 걸어 둔 거예요.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해서 쪽지는 못 썼어요. 저 사범대에 붙었어요. 선생님이 되면 저처럼 혼자 저녁 먹는 아이들 챙길 거예요.” 신 씨는 청년의 등을 두드리며 겨우 말했습니다. “그래, 잘 컸다. 참 잘 컸다.”

그날 네 사람은 학교 앞 백반집에 마주 앉았습니다. 청년이 계란말이 한 접시를 따로 시켰습니다. “오늘은 제가 할머니께 계란말이 대접하고 싶었어요.” 노릇한 계란말이 한 점을 집어 든 신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 것보다 덜 짜네.” 네 사람은 한참을 웃었습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한 노인은 아무도 보지 않는 황무지에 날마다 도토리를 심습니다. 수십 년 뒤 그곳은 맑은 물이 흐르는 숲이 됩니다. 말없이 건넨 정성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 속에서 자라납니다.

내가 베푼 정이 아무 대답 없이 끝난 것 같아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늦는 것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차려 준 밥 한 그릇이 언젠가 한 사람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올봄 세탁소 앞 골목에 목련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신 씨는 셔터를 내린 뒤 남편과 가게 앞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시장 지붕 너머로 저녁노을이 붉게 번졌고, 어느 집에선가 달걀 부치는 고소한 냄새가 골목을 타고 흘러왔습니다. 두 사람은 해가 다 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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