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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 사이에는 셈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집니다. 누가 더 내고 덜 냈는지 따지면 우정에 금이 갈까 봐, 모자란 자리는 말없이 내 주머니로 채우곤 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길어지면, 채운 사람의 수고가 어느새 다른 사람의 공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경상도 바닷가 작은 도시에 사는 강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시장 골목 어귀에서 32년째 철물점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곱 시면 녹슨 셔터를 올리고, 못 한 봉지나 경첩 한 쌍을 사러 오는 동네 사람들을 맞습니다. 아내는 가게 안쪽 작은 방에서 장부를 봅니다. 결혼한 아들은 서울에 살고, 딸은 이웃 도시에서 간호사로 일합니다.
강 씨는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20년째 총무를 맡아 왔습니다. 회장은 고3 때 짝꿍이던 최 씨였습니다. 최 씨는 말솜씨가 좋아 사람을 잘 모았고, 강 씨는 숫자에 밝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동창들은 두 사람을 두고 바늘과 실이라 불렀습니다.
고3 겨울, 강 씨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사흘 밤을 빈소에서 같이 지켜 준 사람이 최 씨였습니다. 강 씨는 그 일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15년 전 최 씨가 식당을 차린다며 보증금이 모자라다고 했을 때, 강 씨는 적금을 깨 1천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돈은 2년이 걸려 돌아왔지만 이자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동창 집에 상이 나면 강 씨가 먼저 달려가 부조 명단을 챙겼고, 화환에는 늘 회장 이름을 달았습니다.
회비 통장은 처음부터 최 씨 명의였습니다. “대표 이름으로 해 둬야 은행에서 말이 적다.” 강 씨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총무를 맡은 첫해 결산 때 장부와 통장 잔액이 40만 원이나 맞지 않았습니다. 강 씨가 묻자 최 씨가 머리를 긁었습니다.
“강 총무, 급해서 잠깐 썼다. 다음 달에 채워 놓을게.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회장이 회비에 손댔다 하면 모양 빠진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해에도 돈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강 씨는 정기총회 전날 밤마다 철물점 하루 매상을 봉투에 담아 은행 기계 앞에 섰습니다. 아내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여보, 또 메웠어요? 이게 몇 해째예요.” 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동창회 깨지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20년 동안 메운 돈이 800만 원이었습니다.
그사이 최 씨의 식당은 번듯하게 커졌습니다. 최 씨는 술자리에서 “우리 총무는 계산기만 두드리지”라며 웃었고, 강 씨를 심부름꾼처럼 부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강 씨는 서운해도 웃어넘겼습니다. 올해 무릎이 나빠진 강 씨는 총무를 내려놓기로 했고, 행사 일주일 전 후임인 윤 씨에게 장부와 통장 사본을 넘겼습니다.
동창회 30주년 행사는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시내 예식장 연회홀에서 열렸습니다. ‘동창회 창립 30주년’이라고 적힌 현수막 아래 둥근 식탁마다 동창 마흔여 명이 앉았습니다. 단상 옆 탁자에는 금빛 공로패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최 씨가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회비 관리가 좀 엉망이었습니다. 우리 총무가 사람은 좋은데 돈을 흐지부지 써서, 해마다 구멍 난 걸 제가 몰래 메워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역시 회장이네!” 박수 속에 공로패는 최 씨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구석 자리의 강 씨는 소주잔을 쥔 손이 떨려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뒷줄에서 윤 씨가 일어섰습니다. 손에는 누런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습니다. “회장, 잠깐만. 다음 총무가 나니까 한마디는 해야겠다.”
윤 씨는 식탁 위에 장부와 통장 사본을 펼쳤습니다. 군데군데 빨간 볼펜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20년 치를 맞춰 봤다. 해마다 총회 한 달쯤 전에 수십만 원씩 빠져나갔는데, 받는 사람이 전부 회장 개인 계좌다. 그리고 총회 전날 밤마다 비슷한 돈이 다시 들어왔는데, 입금자가 매번 강 총무네 철물점이다. 다 합치면 800만 원이다.”
연회홀이 조용해졌습니다. 방금까지 박수를 치던 동창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습니다. 누군가 사본을 넘겨받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옆 사람에게 건넸습니다. 최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건… 내가 다 갚으려고….”
강 씨가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습니다.
“회장, 나는 돈 돌려받으려고 메운 게 아니다. 고3 겨울 우리 아버지 빈소 사흘 지켜 준 거, 그거 갚는다 생각했다. 그런데 흐지부지 썼다는 말은 못 듣겠다. 내가 20년 동안 지킨 건 회비가 아니라 네 체면이었다.”
강 씨는 윤 씨를 돌아보았습니다. “통장은 이제 총무 명의로 옮기고, 결산은 두 사람이 같이 봐라. 그거 하나만 부탁한다.”
강 씨는 우산을 챙겨 연회홀을 나섰습니다. 등 뒤에서 최 씨가 공로패를 식탁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며칠 뒤 동창들 단체 대화방에 회장 사퇴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최 씨에게서는 짧은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미안하다. 돈은 갚겠다.’ 강 씨는 아내와 의논한 끝에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돈은 친구에게 한 마지막 부조로 치마. 대신 다음 총무 앞에서는 떳떳해라.’ 그날 밤 강 씨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총회 전날 은행에 가지 않아도 되는 가을을 맞았습니다.
친구를 위해 말없이 메워 준 돈은 고마운 마음에서 나오지만, 말하지 않은 사실은 언젠가 엉뚱한 사람의 공이 되기도 합니다. 여럿이 모은 돈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 주머니로 남의 구멍을 덮는 일은 친구를 감싸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 친구가 계속 기댈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일 수 있습니다.
정은 정대로 나누되, 돈은 처음부터 투명하게 적어 두세요. 장부 한 줄이 오랜 우정을 지켜 주기도 합니다.
11월의 첫 주말, 강 씨는 철물점 셔터를 일찍 내리고 아내와 방파제를 걸었습니다. 바닷바람은 제법 차가웠고, 등대 너머로 붉은 해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강 씨의 팔짱을 끼며 말했습니다. “올해는 우리 매상, 우리가 다 씁시다.” 강 씨는 웃으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